탈레반은 어쩌다 공포의 대상이 되었나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0 13:00
  • 호수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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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의 새 변수로 떠오른 아프간의 탈레반 정부
‘이슬람 신정국가’ 구현 명분으로 끔찍한 인권 유린 일삼아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기고]

9월11일 완전 철수를 예정하고 있던 미군의 철군이 완수되기도 전에 아프가니스탄은 완전히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아프간 정부가 붕괴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지난 8월15일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있는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아프간 전쟁의 종전을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무책임한 철수를 감행한 바이든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음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실수로 시작된 전쟁을 지속하지 않겠다”며 미군 철수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카불 공항은 비행기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아프간을 탈출하려다 떨어져 죽는 끔찍한 사고까지 발생하는 등 아프간인들의 엑소더스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을 정도다.

탈레반 전투원이 8월18일 카불의 한 거리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로 훼손된 여성의 모습이 담긴 미용실을 지나가고 있다.ⓒAFP연합

소련도, 미국도 두 손 들고 물러난 아프간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간의 미래에 대해 장밋빛 청사진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1997년부터 미군에 의해 진압당했던 2001년까지 탈레반은 아프간을 지배했다. 당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이들의 끔찍한 만행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과거 전적에 비추어 전문가들은 모두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으며, 국제사회는 심각한 여성 인권 유린과 난민 발생 등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탈레반 집권으로 인해 국제질서 또한 요동치게 될 것이다.

탈레반의 등장을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탈레반의 형성과 성장 배후에 미국이 자리한다. 더불어 약소국 아프가니스탄과 강대국의 대결 역사가 등장한다. 고대부터 교통과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았던 아프간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족과 문명이 아프간 땅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동시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아프간은 결국 19세기 제국주의 팽창과 더불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에 휩싸이게 된다. 독립 이후 평화로운 시기도 있었으나 1970년대 중반 아프간 내전이 시작되면서 혼란하고 험난한 현대사가 이어진다.

쿠데타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이슬람 개혁정책 추진으로 공산주의를 탄압하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당 일당 독재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번에는 급진적인 공산화를 진행시키며 이슬람을 탄압하자 이슬람 세력은 ‘무자헤딘’이라는 무장투쟁 조직을 결성해 투쟁한다.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1992년까지 존재는 하지만 여러 군벌의 득세로 사실상 이름만 남게 되는데, 무자헤딘이 득세하자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이 소멸되는 것이 두려워 군대를 파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것이 1980년대 발발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세력 약화 방어를 명분으로 한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됐으나, 막대한 전비를 탕진하고 난 후 소련은 저유가 경제위기 때문에 결국 철수하고 만다. 구소련 붕괴가 아프간 전쟁 실패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당시 구소련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구소련의 팽창을 막고자 무자헤딘을 비롯한 무장투쟁 조직에 막대한 돈과 무기를 지원했다. 문제의 탈레반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됐다.

ⓒAFP연합
아프간 사람들이 카불 공항을 탈출하기 위해 활주로 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AFP연합

탈레반, 미국이 소련 견제 위해 키워낸 조직

탈레반은 1994년경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던 이란계 파슈툰족 2만5000명 정도의 학생이 만든 조직이었다.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파슈툰어로 탈레반은 ‘학생’을 뜻하는 말이다. 이슬람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이라는 이상향을 지향점으로 삼고, 사명감에 똘똘 뭉쳐 부정부패와 비리척결에 나섰다. 공산주의 정권 붕괴 후 무자헤딘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오랜 내전과 부정부패에 질려 있던 민중들은 탈레반을 지지했다. 최고지도자 무함마드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1997년 정권을 장악했다. 1998년에는 영토의 거의 90%를 점령했지만 아프간은 더욱 혼란의 늪에 빠져들 뿐이었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기대와 달리 이슬람 신정국가 구현이라는 탈레반의 국가 건설 과정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잔인하고 끔찍한 통치 방식이었다. 여성들을 부르카 속에 가두고, 집 밖 외출을 통제하는 등 인권 유린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폭파했던 사건은 탈레반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1979년 시아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있었고, 와하비즘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 극단적 보수주의 수니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있었지만, 탈레반이 구현한 ‘이상적 신정국가’와는 차이가 컸다.

결국 2001년 9·11 사태가 발발하자 미국은 제국의 무덤이라는 아프간을 침공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표현대로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미국은 9·11 사태를 일으킨 주범인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을 탈레반이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다.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도, 그리고 탈레반도 미국이 구소련을 방어하기 위해 키워낸 무장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다른 조직이지만 자금 조달 등 상당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은 마침내 아프간 침공 10년이 지난 2011년에야 사살됐지만 탈레반이 파키스탄 국경 밖으로 쫓겨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개전(開戰) 한 달 만에 수도인 카불과 주요 도시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그러나 탈레반과의 전쟁은 20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결국 탈레반의 손에 아프간을 넘겨준 채 철수하고 말았다.

반면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지원으로 연명해 오다가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아프간이 미국의 관심권에서 멀어지자 세를 불려 파키스탄 서북부를 장악하며 부활했다. 파키스탄 북부는 아프간의 주요 부족인 파슈툰 부족이 대부분이며 산악 지역이라 사실상 국경이 별로 의미가 없는 지역이다. 무기 제조 등에 필요한 모든 인력과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니, 탈레반의 요충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프간은 전 세계 헤로인의 90%가 생산되는 마약 생산기지인데, 탈레반은 마약 제조로 자금을 확보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아프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와 전쟁 비용을 지불하고도 아무 성과나 수확도 없이 철군한 셈이다.

이에 비해 아프간을 탈환하려는 탈레반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무엇보다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사명감과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는 그동안 전쟁 경험을 통해 축적된 전략과 전술을 통해 더욱 진화했다. 그 결과 미국이 빠져나간 공백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수도 카불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아프간 정부 내부의 리더십 붕괴도 한몫했다.

아프간 정부군은 전선을 축소해 대도시 위주로 방어하려 했으나, 이는 군기 빠진 군대에서 효력이 없는 방어 전략이었다. 탈레반이 여러 개의 조직으로 구성돼 있음에도 중앙통제력을 확보해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는 것은 놀라운 대목이다. 대외적으로는 아프간을 외부적으로 고립시켜 우방 국가의 지원을 차단하는 전략을 썼고, 내부적으로는 각 지방의 주지사와 같은 공직자들과 개별 협상을 통해 비리 혐의 등으로 협박하며 무력화시킴으로써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카불을 포위했다.

아프간의 추방 여성들이 8월10일 카불의 한 공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AP연합
아프간 여성들이 8월17일 카불에서 탈레반에 자신들 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촉구하는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다.ⓒREUTERS

反탈레반 세력 규합되면 내전 가능성도

전 세계가 무방비 상태로 탈레반의 카불 입성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던 가운데 탈레반은 국제사회의 우려와 불신을 인식했는지 곧바로 유화적 성명을 내놓았다. “외국 군대 협력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은 물론 외국인들의 안전과 생활을 보장하고 여성들의 교육과 취업을 보장하는 것과 함께 최대한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탈레반의 성명과 다르다. 이미 지방에서는 미군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부르카를 쓰지 않은 여성에게 탈레반이 총을 겨눈 사진들이 보도되고 있다. 과거 탈레반 집권을 경험한 사람들이 탈레반의 ‘감언이설’을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탈레반이 이끄는 아프간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 인권 유린, 마약 확산, 쏟아지는 난민 문제 등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인류애적인 문제가 산재한 가운데 러시아는 서둘러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탈레반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파키스탄은 물론이고, 이란과 중국은 탈레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은 특히 1990년대 중후반 탈레반의 성장과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에 큰 역할을 한 나라이고, 무기와 정보, 인력 등을 제공해 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파키스탄 북부는 탈레반 활약의 주요 무대이며, 탈레반을 통해 파키스탄은 인도를 견제하려 하고 있다. 한 가지, 파키스탄 탈레반은 아프간 탈레반의 중앙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조직으로 남아있는데, 인도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어 아프간 탈레반과는 별도의 전략으로 움직이고 있다.

특히 탈레반과 중국의 관계는 향후 국제질서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입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외교는 탈레반이 신장·위구르 독립운동단체인 ‘ETIM’을 통제할 수 있도록 탈레반 달래기에 주력하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중국은 이란과 아프간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으로 연결되는 배후지역을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반미(反美) 대륙 세력 형성이라는 든든하고도 큰 성과를 얻게 된다. 탈레반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지만, 이미 중국의 기술적 도움이 절실한 탈레반은 중국 왕이 외교부장과 만나 아프간에 체류 중인 중국 기술자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다는 보도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를 보면 중국은 상당 부분 탈레반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이 신장·위구르 독립운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국내 사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가운데 앞날을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탈레반과 맞서던 군벌 세력과 구(舊)정부군이 합류해 ‘반(反)탈레반’ 세력을 형성한다면, 은 또 다른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이목이 에 쏠려 있는 가운데 주변국들과 강대국들의 움직임이 아프간 국내 상황을 조정하는 데 한몫할 수 있어 소용돌이는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런 혼란 속에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게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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