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로 시작해 ‘김연아’ 같은 마침표를 꿈꾸는 유영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15 15:00
  • 호수 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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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국내 최초 트리플 악셀 성공하며 베이징올림픽 여자 피겨 출전권 따내
러시아·일본 등과 메달 경쟁 기대

1년 전이었다. 막 대회를 마친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있었다. 2년을 기다린 세계선수권 출전을 방금 전에 놓친 터. “이번 시즌에는 자가격리만 3차례 이상 했다. 신체적으로, 멘털적으로 제일 힘들었다. 마음으로는 불안하고 몸으로는 긴장했는데 연습을 많이 못 해 문제가 된 것도 같다. 실전 감각이 떨어진 면도 있었다. 작년에도 세계선수권에 못 나갔기 때문에 많이 아쉬운데 앞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 더 준비를 잘해서 다음 시즌에는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

그 후 1년이 흘렀다. 그는 같은 대회, 같은 장소에서 다짐대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폈다. ‘차세대 김연아’라고 불렸으나 여러 부침을 겪은 한국 피겨의 간판 유영(18·수리고)의 얘기다.

유영은 1월10일 의정부 실내빙상장에서 끝난 제76회 전국남녀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 겸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당당히 우승하면서 생애 첫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고도 2018 평창올림픽 때는 참가하지 못했던 그다.

ⓒ연합뉴스
유영이 1월9일 의정부 실내빙상장에서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해 열린 ‘KB금융 코리아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2022’ 대회 3일 차 시니어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평창올림픽 때 국내 1위 하고도 나이 제한으로 출전 못 해

유영의 피겨는 2010년 시작됐다. 김연아가 밴쿠버올림픽 때 금메달을 땄던 그때, 맞다. 김연아는 당시 쇼트프로그램 때 ‘007 본드걸’로 변신해 전 세계 겨울스포츠 팬들을 사로잡았다. 가족들과 싱가포르에 살던 6세의 유영도 김연아가 발사한 손가락 총에 심장을 관통당했고, 이후 피겨선수가 되겠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또 한 명의 ‘연아 키즈’가 탄생한 셈.

처음에는 취미로 피겨를 했지만 점점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더운 나라인 싱가포르의 훈련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다. 2013년 본격적으로 피겨를 배우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 9세였다. 아기 때 싱가포르로 건너갔던 터라 한국말이 서툴러 적응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이듬해 트리플(3회전) 점프 5종을 다 뛰었고, 2015년에는 최연소(만 10세 7개월) 국가대표가 됐다. 2016년에는 언니들을 제치고 종합선수권 1위에 오르며 김연아가 기록했던 최연소 우승 기록(12세 6개월)을 갈아치웠다. ‘피겨 신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실시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그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나이 제한(올림픽 직전 7월 기준 만 15세 이상)에 걸려 최다빈·김하늘에게 태극마크를 양보해야 했다. 당시 그는 김연아 이후 국내 선수로는 최초로 총점 200점도 넘었다.

그 후 4년의 세월 동안 유영은 많은 일을 겪었다. 신체적 변화를 겪으면서 발목·무릎에 고질적 통증이 왔다. 2016년 143cm였던 키는 지금 166cm까지 자랐다. 그래도 몸에 힘이 붙으면서 트리플 악셀(앞으로 도약해 공중 3.5회전 뒤 뒤로 착지) 성공률이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기어이 국내 선수 중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공식 경기에서 성공시킨 선수가 됐다. 시니어 데뷔 시즌(2019~20)에 그랑프리대회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4대륙선수권대회 때는 김연아 이후 최초로 은메달을 따냈다. 기대감은 증폭됐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시련이 닥쳤다. 세계선수권대회는 취소됐다. 훈련 상황은 녹록지 않았고 2020~21 시즌은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않았다. 국내에서 ‘나 홀로’ 훈련해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잦은 격리 생활로 멘털은 무너져 갔다. 최악의 시즌이었고 2년 만에 열린 세계선수권 무대도 놓쳤다.

2년째 코로나19 상황이 이어지자 점점 적응돼 갔다. 국내에서 지현정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나만의 훈련 노하우를 찾으며 안정된 훈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1~22 시즌 시니어 그랑프리대회에서 연속 메달(동메달)을 따냈다. 김연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베이징올림픽 1, 2차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었다. ‘유영의 귀환’이라고 할 만했다. 특히 2차 선발전 때 쇼트프로그램에서는 트리플 악셀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프리스케이팅 때도 감점이 있기는 했지만 넘어지지 않고 랜딩에 성공해 자신감이 더욱 붙는 계기가 됐다.

유영은 태극마크를 확정 지은 뒤 환하게 웃으면서 “부담감 속에 많이 긴장하며 선발전을 치렀는데, 실수 없이 연기를 펼친 것 같다. 한 단계 더 성장한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힘든 점이 많았지만,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훈련했다. 아직 베이징올림픽에 나선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올림픽이라는 꿈의 무대를 즐기고 싶다”고도 했다.

 

세계랭킹 1~3위인 러시아의 두터운 벽 넘어야

유영이 올림픽 시상대에 서려면 반드시 러시아를 넘어서야만 한다. 세계 순위(2021년 12월15일 현재) 1~3위가 모두 러시아 선수들이다. 안나 쉐르바코바(18)가 1위를 달리고 있고, 알렉산드라 트루소바(18)가 2위에 랭크돼 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세바(26)가 3위. 여기에 최근 무서운 신예, 카밀라 발리예바(16)까지 등장했다.

발리예바는 지난해 12월 열린 러시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제일 먼저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시니어 데뷔 해를 보내고 있는 발리예바는 주니어 때부터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뛸 정도로 세계 여자 싱글에서 최고 테크닉을 자랑한다. 발리예바와 더불어 트루소바가 출전권을 획득했고, 쉐르바코바는 러시아빙상경기연맹 감독자 회의를 통해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이들 외에도 일본의 사카모토 가오리(22·세계 4위)가 유영과 메달을 다툴 것으로 보인다.

‘겨울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피겨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2018 평창올림픽 남자 싱글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점프 머신’ 네이선 첸(미국)은 쇼트프로그램에서 전에 없던 실수를 연거푸 한 끝에 17위로 미끄러지면서 최종 성적 5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만큼 올림픽은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는 무대다. 올림픽 최종 시상대에 누가 설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과거 인터뷰에서 2022 베이징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중국어로 소감을 밝히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는 유영. 그는 과연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고 중국말로 소감을 말할 수 있을까. 일단 1차 관문(국가대표 선발전)을 가뿐히 통과한 유영은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스케이트화를 달군다. ‘김연아’로 시작해, ‘김연아’ 같은 마침표를 꿈꾸며 빙판 위를 유영하는 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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