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가 그랬듯, 차준환이 걷는 길이 곧 역사가 된다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2.19 15:00
  • 호수 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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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피겨의 개척자, 그의 모든 기록에 ‘최초’ ‘최고’ 붙어
평창 15위 → 베이징 5위 → 2026 올림픽 메달 목표

첫 시작은 아홉 살 여름방학 때 참가한 피겨 특강이었다. 스케이트화를 신고 쭉 밀면 얼음 위로 미끄러져 앞으로 나가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시원한 느낌이 점점 좋아졌다. 이후 소년의 ‘처음’은 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의 역사가 됐다. 차준환(21·고려대)의 이야기다.

ⓒ연합뉴스
차준환이 2월10일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에서 《투란도트》의 음악에 맞춰 연기를 펼치고 있다.ⓒ연합뉴스

바람의 스케이터…초긍정 마인드도 장점

‘피겨퀸’ 김연아가 그랬듯 차준환 또한 개척자였다. 주니어 때부터 도드라진 활약을 보였다. 한국 남녀 통틀어 공식 대회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에 처음 성공했고, 주니어 세계신기록까지 작성했다. 2016~17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남자 피겨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땄다. 시니어 데뷔 이후에는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메달(동메달)을 딴 최초의 한국 남자 피겨 선수가 됐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남자 싱글 최연소 출전자(17세)로 종합 15위(쇼트 84.34점, 프리 165.16점, 종합 248.59점)에 올랐다. 한국 남자 피겨의 올림픽 최고 순위(종전 1994년 릴레함메르 정성일 17위)였다. 올림픽 개막 전에 고관절을 다치는 등 최악의 상황에서 일궈낸 성적이었다. 아쉬움이 짙게 남은 올림픽 데뷔전이었지만 차준환은 “평창대회가 터닝포인트가 됐다. 굉장히 긍정적인 힘과 에너지를 줬다”고 했다.

차준환은 이후 다음 올림픽, 베이징을 겨냥했다. “평창 결과를 토대로 열정적으로 연습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2018~19 시즌에는 그랑프리 대회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또한 국내 남자 피겨 선수가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오프시즌에는 캐나다 토론토로 가서 김연아와 금메달 영광을 함께했던 브라이언 오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조금씩 더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덜컥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도래했다. 국외에서 훈련을 이어갔던 터라 그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오서 코치와 훈련할 길이 막혔다. 국제대회는 줄줄이 취소됐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 수도권 스케이트장이 폐쇄돼 지방으로 가야만 했다. 포항에서 1주일 머무르고, 강릉에서도 1주일 머무르는 식이었다. “어떻게든 연습을 이어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차준환은 긍정적 마인드를 잃지 않았다.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훈련 상황이 장점도 있었다”고 했다.

차준환은 2021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종합 10위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의 동계올림픽 출전권 두 장을 따냈다. 한국 남자 피겨 선수 두 명이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나란히 설 기회를 만들어냈다. 2021~22 시즌 시니어 그랑프리 4차 대회(NHK트로피) 때는 2018~19 시즌 이후 3년 만에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전초전 격으로 열린 4대륙 피겨선수권에서는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비록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본·미국 상위권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자신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4대륙 대회에서 한국 남자 선수가 시상대에 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차준환의 상승세는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이어졌다. 첫날(8일) 쇼트프로그램에서 ‘퍼펙트 클린’ 연기로 생애 최고 점수(99.51점)를 받아들며 당당히 4위에 랭크됐다. 99.51점은 한국 남자 피겨 쇼트 신기록이기도 했다. 원래 목표인 톱10을 넘어 톱5까지 실현 가능한 점수였다. 팬들이 추천해준 음악(페이트 오브 더 클락메이커)으로 꾸민 무대라서 더욱 뜻깊었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첫 점프(쿼드러플 토루프)에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나머지 기술 요소는 모두 깔끔하게 처리했다. 실수가 나오면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아 다음 수행 기술이 흔들리기 마련인데도 차준환은 평정심을 곧바로 찾으면서 182.87점을 받았다. 쇼트와 프리 합해 종합 282.38점으로 최종 5위. 프리 점수도, 종합 점수도 개인 최고이자 한국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그는 늘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국내 남자 피겨 최초, 최고의 기록으로 착지했다.

 

숙제로 남은 쿼드러플 점프…뛰는 횟수 더 늘려야

최대 장점은 곡 해석력이 좋다는 것이다. 이호정 SBS 피겨해설위원은 “스케이팅을 할 때 배경음악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안다. 음악 해석 능력이 좋고 강약 조절도 좋다”고 말한다. 차준환은 “음악을 선택하고 수백 번 듣다 보면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온다”고 했다.

팔다리가 긴 장점도 있다. 키 180cm에 육박하는 차준환은 남자 피겨 양대 산맥인 네이선 첸(미국·168cm), 하뉴 유즈루(일본·172cm)보다 훨씬 더 크다. 이 때문에 얼음 위 동작 하나하나가 시원시원하다. 손끝과 발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안무 수행력은 어릴 때부터 발레와 현대무용을 해서 더욱 극대화됐다. 최근에는 “선을 배우는 춤이 아닌 다른 춤을 배우고 싶어서” 힙합댄스까지 배웠다.

스스로 말하는 그의 장점은 “긍정적 모드”. 약점으로는 “쿼드러플 점프 성공률”을 꼽는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차준환은 쿼드러플 점프를 3차례 뛰어 2차례 성공했다. 사실 이번 대회 때는 “잘하는 부분을 극대화하기 위해” 성공 확률이 낮은 쿼드러플 점프를 많이 뛰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톱5를 넘어 세계선수권, 그리고 올림픽 시상대에 오르려면 쿼드러플 점프 횟수를 늘려야만 한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첸은 쇼트에 2차례, 프리에는 5차례 쿼드러플 점프를 배치했다. 프리에서 은메달리스트 가기야마 유마(일본)는 4차례, 동메달리스트 우노 쇼마(일본)는 5차례 쿼드러플 점프를 뛰었다. 2차례 쿼드러플 점프를 시도한 차준환이 이날 받은 프리 기술 점수는 93.59점. 하지만 상위권 선수들은 프리 기술 점수로만 100점 이상을 받는다. 상위권 경쟁을 위해 쿼드러플 점프 완성도를 높이고 프리에서 최소 3차례 뛰어야만 하는 이유다. 차준환도 이를 알기에 올림픽이 끝난 뒤 “더 많은 4회전 점프로 더 높은 프로그램 구성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차준환은 피겨홀릭 선수다. 좋아하는 걸그룹도,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없다. 골반이 아프고 오른발목이 아파도 오로지 ‘피겨’ 생각뿐이다. 오죽하면 “하루하루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은 스케이트에 대한 열정”이라고 할까. 베이징올림픽 남자 싱글 경기가 끝난 다음 날(2월11일)에도 그는 경기장에 나가 훈련을 했다. 당장은 오는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톱5 이상 성적을 노린다.

차준환의 MBTI(성격 유형 검사)는 엔티제(ENTJ). 성격 유형에서 엔티제는 ‘활동적이며 사교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세워 노력한다’라고 돼있다. 그가 걸어온 피겨의 길과 닮았다. “하루하루를 채워 멋진 1년을 채우겠다”는 그의 ‘오늘’이 쌓여 한국 피겨의 ‘내일’이 되고 있고, 이제 그는 앞으로 맞닥뜨릴 ‘내일들’로 또 다른 길 개척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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