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모두가 존경하는 정치인이 있다. 바로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DJ가 살아있었다면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에 어떤 조언을 해줄까. 그는 지금의 정치 양극화와 정치 실종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김대중 정신’으로 다시 대한민국이 통합과 화해를 이룰 수는 없을까. DJ 생전 ‘그의 분신’으로 불리던 권노갑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다.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그의 행동은 정치 원로답게 신중했다. 말에는 깊은 고민과 무게감이 실려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있었다. 

권 이사장은 3월16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서 진행된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여야 모두 이번 대통령선거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선거에서 이긴 국민의힘은 교만해서는 안 되며,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윤 당선인은 “민심이 천심”이라는 다섯 글자를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원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이야기도 꺼냈다. 윤 당선인이 문 대통령에게 새 시대 국민 대통합을 위해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포함해 전반적인 대사면을 건의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윤 당선인의 국정 구상에 화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권 이사장은 “윤 당선인은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들뿐만 아니라 지지하지 않은 국민도 아우르는 지도자가 돼야만 한다. 그게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통합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1997년 12월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당선인의 건의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다. 권 이사장은 윤 당선인이 정치보복 우려를 불식하고 관용과 통합의 정치력을 발휘할 때라고 했다. 그게 김대중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대선이 끝났습니다. 예상 밖의 초접전이었습니다. 25만 표, 0.73%포인트 득표율 차이라는 민심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윤 당선인은 ‘민심이 천심’이라는 뜻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국민은 현재 집권 세력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윤 당선인 측에도 결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절묘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무서운 명령입니다. 오로지 국민의 뜻을 떠받드는 겸손하고 유능한 정치 세력이 될 것을 주문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다시 심판할 것이라는 예고를 한 셈입니다.”

국민은 결국 정권교체를 선택했습니다. 국민이 윤 당선인에게 요구한 민심은 무엇일까요.

“‘통합’입니다. 국민을 갈라치지 말고 미래를 위해 하나로 묶을 정치력을 발휘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적폐청산 같은 정치보복을 하지 말고 이념, 지역, 세대, 남녀, 계층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을 치유하는 국민화합의 정치를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국내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미·중 간 패권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국제정치 관계의 변화, 4차 산업혁명이란 문명의 대전환, 기후위기로 인한 새로운 생태학적 경제와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양식 변화 등 대전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역사가 전진하려면 과거에 묶여있으면 안 됩니다. 윤 당선인이 유세 과정 내내 존경한다고 밝혔던 ‘김대중 정신’을 되새기길 바랍니다.”

어떤 식으로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윤 당선인이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뿐만 아니라 지지하지 않았던 유권자도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대선후보와 통치자, 지도자는 위상과 권한, 역할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제 48.56%를 얻는 유세가 아닌, 전 국민의 뜻을 헤아리는 정치를 해야 할 때입니다. 문 대통령도 취임 초에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지만, 낡은 이념의 굴레에서 적폐청산을 외치면서 자기들끼리만의 정치를 했기 때문에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윤 당선인은 정치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전직 검찰총장을 불과 몇 개월 만에 대통령이 되게 한 국민의 뜻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윤 당선인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윤 당선인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새 시대와 국민통합을 위해 MB를 포함한 대사면을 건의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 대통령도 자기 임기에 있었던 모든 일을 결자해지한다는 차원에서 화답해 주면 좋겠습니다. YS가 그랬습니다. YS와 DJ의 결단으로 다시 전진했던 역사를 두 사람이 재현해 주면 좋겠습니다.”

문 대통령은 앞서 건강 악화 등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면하면서 MB는 경우가 다르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대선이 끝났고, 그때와는 상황이 또 달려졌다고 봅니다. 누구는 넣고, 누구는 빼고 하지 말고 대사면이 필요합니다.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할 때 이런 결정도 같이 이뤄졌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

여론의 반발이 상당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

“정치가 그래서 어렵고, 지도자의 역할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DJ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한다고 했을 때도 반발이 많았습니다. 지도자는 국민의 뜻을 잘 헤아리면서, 동시에 국민정서에만 휩싸여 의사결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도 얼마나 반발이 심했습니까. 하지만 결정 이후 국민 여론 상당수는 잘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심을 면밀하게 살피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수면 아래 도도하게 흐르는 민심의 요구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읽어야 합니다.”

국민 앞에 한 번도 용서를 구하지 않은 전두환 사면에 대해서는 아직도 반발의 목소리가 상당합니다. 

“반성과 사과가 없어도 용서와 화해를 추구했던 DJ의 높은 정신을 곱씹어봐야 합니다. 전두환은 DJ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DJ가 살아계셨다면 그의 빈소에 조문하지 않았을까요. 찾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물론 윤 당선인도 찾지 않았습니다. DJ는 정치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DJ 병세가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전 전 대통령은 병원에 찾아와 ‘퇴임 이후 DJ 대통령 시절이 제일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DJ는 자신에게 가장 모질었던 박정희와 박근혜도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DJ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고, 나를 박근혜 의원과 함께 부회장을 하게 했고, 기념관 건립비 200억원도 지원했습니다. DJ가 왜 그랬는지, 그 정신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유독 정치보복 근절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국민은 반세기 만에 민주적·평화적 정권교체를 성취하고, 우리나라를 빈곤국가에서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고, 한류 문화를 전 세계에 파도치게 하는 위대한 국민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정치보복의 갈라치기로 국민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갈등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면 한순간에 불행했던 과거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여러 면에서 냉엄한 국제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화합으로 위대한 우리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해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DJ는 1997년 대선 승리 이후 당시 YS에게 건의해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다. 임기 중에는 두 사람은 물론 노태우·YS·최규하 전 대통령 등을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을 논의하며 예우했다. DJ는 정치적으로 1980년 5·18의 최대 피해자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내란 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워 DJ를 체포했고, 신군부에 협조하라고 회유했다가 거부당하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다. DJ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대의적·법적으로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 DJ는 왜 그랬을까. 그는 퇴임 후 자서전에서 ‘국민에게 통합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평생 “피해 당사자가 화해 당사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박정희기념관 건립에도 앞장섰다.

1930년생. 목포 출신, 원적지는 경북 안동.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분신으로 불렸다. 29세부터 48년 동안 DJ와 정치 역정을 함께했다. DJ와의 인연은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때 직업(목포여고 영어교사)까지 그만두고 그를 돕는다. 이후 목포상고 4년 선배인 DJ의 정치적 시련기에도 늘 곁을 지키며 조직과 자금을 관리하며 2인자로 활동했다. DJ가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등을 제외하고 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13·14·15대 국회의원과 당총재 비서실장을 역임했을 뿐 DJ 집권 때도 권력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노무현 대통령 집권 때까지 정치적 이유로 다섯 번 교도소에 갔다. 2007년 1월4일 병실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목포상고와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여든이 넘은 나이에 한국외대 영문학 석사 과정에 입학해 단 한 번의 결석 없이 4학기를 마칠 정도로 학업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한국외대 역사상 최고령 석사학위 취득자다. 2016년 민주당을 탈당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돕다 민주평화당 창당에 참여해 고문으로 활동했다. 민주평화당 분당 이후 탈당했고, 2021년 12월 민주당에 복당했다. 현재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명예이사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이사장을 맡고 있다. 여전히 동교동계의 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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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전영기 편집인/정리=김종일 기자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