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전·기만전 속 커지는 푸틴의 건강 이상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6.05 12:00
  • 호수 17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방과 러시아 간 정보전의 하나로 사용되는 형국
추측 난무…정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건강 이상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푸틴의 건강 이상설은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더욱 기승을 부린다. 푸틴은 오는 10월7일로 만 70세가 된다. 서구 기준으론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러시아에선 경우가 다르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16년 러시아인의 기대수명이 남성은 66.5세, 여성은 77세다. 특히 과도한 음주 등으로 인한 성인병과 각종 사고로 남성의 35%는 60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며, 65세까지 생존하는 비율도 43% 정도다.

하지만 푸틴은 오랫동안 신체적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홍보됐다. 웃통을 벗고 펄쩍거리는 연어를 움켜쥔다든지 말을 타고 사냥총을 든 채 야외를 돌아다니는 모습, 힘차게 수영하는 모습, 유도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근육과 활력으로 무장한 건장한 ‘마초’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은 공개 석상에서 여러 차례 건강 이상이 추측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 TASS 연합
3월15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러시아 연방의료생물학청(FMBA)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의약품을 살펴보고 있다.ⓒTASS 연합

러 외교장관의 푸틴 건강 직접 해명 ‘이례적’

푸틴의 건강에 관한 추측이 극에 달한 것은 5월29일이다. 이날 영국 해외정보기관인 MI6의 전직 러시아 담당 부서장인 크리스토퍼 스틸이 푸틴의 건강 이상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주장을 펴면서다. 스틸은 영국 토크쇼 라디오인 LBC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이 “갈수록 병세가 심해지고 있다”며 “이는 크렘린궁에서 그의 리더십과 우크라이나 전쟁 관리 능력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5월18일엔 MI6의 국장(1999~2004년)을 지낸 리처드 디어러브가 한 팟캐스트에서 “푸틴이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으며, 2023년까지는 요양원에 들어가 러시아의 지도자로서 힘을 더는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근거다. 스틸은 푸틴이 여러 차례 병원 치료를 받느라 회의를 취소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정황증거만으로 푸틴의 건강 상태를 추측했다는 이야기다. 디어러브 전 국장도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정보 세계를 떠난 지 이미 18년이나 된 상황이라 발언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정보 당국도 푸틴의 건강 문제를 지적하는 다양한 주장에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급기야 5월29일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부 장관은 프랑스 텔레비전 채널인 TF1에 출연해 “푸틴 대통령은 텔레비전에 거의 매일 출연하고 있다”며 건강 이상설을 반박했다. 라브로프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이 남자에게서 병세나 불안정의 징후를 추측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푸틴의 건강 문제를 크렘린궁이 아닌 러시아 외교부 장관이 앞장서 해명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푸틴의 건강 이상설이 서방과 러시아 간 디스인포메이션전과 정보전·심리전·기만전의 하나로 사용되는 형국이다. 라브로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디스인포메이션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계 매체들, 앞다퉈 다양한 추측 쏟아내

푸틴의 건강 이상설이 본격적으로 확산한 것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두 달이 다 돼가던 4월21일이다. 당시 푸틴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을 만나면서 탁자의 끝을 움켜쥔 채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안색도 좋지 않았다. 뉴스위크는 이를 두고 푸틴이 불편해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비디오가 나온 뒤 전 세계 매체들은 푸틴의 건강을 두고 다양한 추측을 쏟아냈다.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 푸틴이 앓고 있을 것으로 가장 흔하게 추측됐던 질환이 파킨슨병이다. 뇌 부위의 퇴행성 장애로 몸이 떨리거나(진전), 뻣뻣해지거나(강직), 동작이 느려지거나(서동), 몸의 균형 유지가 어려운(자세 불안정) 운동장애가 나타나는 질환이다. 푸틴이 보인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선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만년에 앓아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뇌간의 중앙에 있는 뇌 흑질의 도파민계 신경이 파괴돼, 신체를 정교하게 움직이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분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생긴다. 신체 부위의 이상으로 끝나지 않고 환자의 사고 능력이 떨어지고 치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를 바탕으로 푸틴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근거는 없다.

근골격 손상 등 정형외과 질환과 만성 호흡기질환, 감염질환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푸틴이 어떤 질환을 앓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테로이드를 복용해 그 부작용으로 떨림 증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푸틴은 2012년 행글라이딩을 하다 등을 다친 적이 있다. 당시 크렘린궁은 “통상적인 스포츠 손상으로 근육 긴장을 겪었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푸틴은 2017년 소치에서 아이스하키 시범경기에 나왔다가 충돌 사고를 당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그 뒤 소치의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정형외과 시술을 받았다고 러시아 독립언론 프로에크트가 주장했다. 이런 경우 스테로이드를 단기적으로 쓸 수는 있다.

올해 5월 들어 미국 워싱턴DC에 본부를 둔 뉴라인 매거진이 익명의 올리가르히(러시아 체제 전환기 과두재벌)로부터 입수한 정보라며 푸틴이 혈액암으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이 올리가르히는 자신의 말이 녹음되는지 모른 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 이런 발언을 했으며 “우리 모두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뉴라인은 전했다.

월14일엔 우크라이나 군사정보 책임자인 키릴로 부다노프 장군이 영국 스카이뉴스에 러시아에서 푸틴을 실각시키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며 69세인 그의 건강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몹시 나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푸틴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쿠데타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부다노프는 푸틴이 암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자신이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위해 프로파간다를 확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서방 정보기관도 그의 발언을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펼치는 디스인포메이션전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독일 국제방송인 DW는 “푸틴이 설혹 건강이 나쁘다고 해도 정확한 진단은 개인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 알려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푸틴이 외부 행사에 참석한 사진을 보거나 여러 가지 상황에 맞춰 추측한 것일 뿐 근거 있는 자료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지적이다. 22년간 러시아의 절대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푸틴의 건강에 실제로 이상이 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