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맨’ 리창, 역대 가장 무색무취한 중국 총리 될 수도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18 10:05
  • 호수 174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진핑이 낙점하고 키운 새 총리 리창, 뼛속까지 ‘시진핑맨’
한국 두 차례 방문해 이낙연과 회담하기도

3월13일 중국 베이징시의 인민대회당.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직후 중국 행정부 격인 국무원 총리의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틀 전에 새로 선임된 리창 총리의 첫 정치적 데뷔 무대였다. 리 총리는 각오를 2분간 간단히 밝힌 후 질의응답을 무려 113분 동안 했다. 10개 질문을 받았는데 경제, 인구 감소, 농촌 활성화, 코로나19 대책, 홍콩과 대만 문제, 미·중 관계 등 여러 대내외 문제가 거론됐다. 이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리 총리는 ‘발전’ 46번, ‘개혁개방’ 13번, ‘취업’ 12번, ‘인구’ 10번 등을 언급하면서 경제에 주안점을 두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내용은 당연한 결과였다. 중국에서 총리는 오직 경제와 내정을 관할한다. 그 외 핵심 실권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갖고 있다. 더군다나 시 주석 집권 이후 ‘2인자’ 총리의 권한과 운신 폭은 크게 좁아든 상태다. 그렇기에 리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원론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 향후 경제정책의 방향조차 3월5일 리커창 전 총리가 정부 업무보고를 통해 거론한 내용을 답습했다. 리 총리만의 색깔을 보여줄 만한 발언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질의응답 과정에서는 우리의 관심이 쏠렸던 한국과 북한 등 한반도 문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렇듯 실망스러운 기자회견은 이미 예정된 결과였다. 지난해 제20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리창 총리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되고, 이번에 총리에까지 오른 배경이 시 주석의 깊은 총애에 있었기 때문이다. 리 총리는 지난 6년여 동안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시 당서기로 재임했다. 이 기간 상하이는 중국에서 GDP 규모 1위의 자리를 굳건히 고수했고, 코로나19 사태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상하이 시민들에게 각인될 만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따라서 중국 내외 일각에서는 리 총리의 리더십에 의문을 나타내는 상황이다.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리창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3월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4기 1차 회의 제3차 전체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상하이 봉쇄 때 주민 항의에 당혹해하기도

향후 10년 동안 중국 경제를 이끌어갈 리 총리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1959년생으로 올해 63세다. 저장(浙江)성의 작은 도시인 루이안(瑞安)에서 태어나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문화대혁명(문혁) 기간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이 합쳐진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7세부터 노동자로 고향의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름 두각을 나타냈다. 1978년 문혁의 폐허를 딛고 중국 대학들이 다시 정식으로 신입생을 모집하자, 저장농업대학 농업기계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간부로 성장했다.

이 시기 수완을 발휘했기에 2년 만인 1984년 저장성 민정청 간부로 승진해 성정부로 영전할 수 있었다. 그 후 13년 동안 민정청에서 잔뼈가 굵었다. 중국 부처인 민정청은 중국인의 민생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관할한다. 또한 지방행정과 관련된 사무도 처리한다. 따라서 핵심 부처는 아니지만 내실 있는 알짜 부서다. 리 총리는 1996년 융캉(永康)시 당서기로 내려가 경력을 쌓은 후 1998년에 다시 저장성 정부로 돌아와 핵심 요직인 공상행정관리국장까지 역임했다. 2002년에는 당시 저장성 2대 도시였던 원저우(温州)시 당서기가 되었다.

그리고 리 총리는 2004년 저장성 공산당위원회로 들어가면서 ‘귀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저장성 당서기로 재임 중이었던 시진핑이다. 이때부터 시 주석이 상하이시 당서기로 영전하는 2007년까지 비서장 겸 판공청장(비서실장)으로서 시 주석을 보좌했다. 주목할 점은 시진핑이 이미 2002년 저장성 당서기가 되어 근무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리 총리가 시 주석의 첫 비서실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단시일 내에 시진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청년기에 비슷한 성장 과정과 경력을 거쳤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시진핑은 문혁 시기 청소년과 청년을 농촌과 공장으로 내려보내는 하방(下放)을 당해,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의 시골 마을 량자허(梁家河)에서 7년 동안 지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능력을 발휘해 마을의 당서기까지 됐다. 1975년에는 지방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이공계 최고 명문대학인 칭화(清華)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국무원에서 일했던 2년을 제외하고, 1982년부터 지방에 내려가 줄곧 경력을 쌓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런 시진핑으로선 노동자였다가 대학에 갔고 지방정부에서 계속 능력을 발휘했던 리창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 주석이 리 총리를 얼마나 각별히 여겼는지는 그 후 리 총리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리 총리는 2012년이 되어서야 저장성 당위 부서기로 승진했다. 시 주석이 제18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총서기가 됐던 직후다. 리창은 이듬해 저장성 성장이 되었고, 2016년에는 중국에서 경제 규모가 두 번째로 큰 성인 장쑤(江蘇)성 당서기로 초고속 승진했다. 2017년 시진핑이 총서기를 연임하자,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진입했고 상하이시 당서기가 되었다. 이렇듯 지난 11년 동안 이어지는 승진가도는 오직 시 주석과의 인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리 총리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지난해 3월말부터 상하이시는 코로나19로 인한 봉쇄에 들어갔다. 봉쇄 초기부터 시정부는 시민들에게 식료품을 원활히 공급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코로나19보다 봉쇄 때문에 먼저 굶어죽을 판”이라는 시민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당초 시정부는 철저한 봉쇄를 통해 코로나19 확산을 단시일에 막겠다고 장담했다. 이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얕잡아본 오판이었다. 결국 코로나19 확산을 계속 막지 못했고, 6월1일에야 상하이시는 봉쇄를 해제했다. 이 시기에 중국 SNS에 퍼졌던 유명한 동영상이 하나 있다.

 

‘경제 위해 시 주석이 어느 정도 재량권 줄 것’

4월11일 당시 리창 당서기가 봉쇄된 여러 아파트 단지를 시찰하며 방역요원을 격려했다. 한 아파트 정문에서 방역요원 및 주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민들이 몰려왔다. 그리곤 리창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주민 한 명이 이 과정을 휴대폰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동영상에는 리창이 당혹해하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중국에서 지방정부의 최고 수장이 현장 시찰 중 주민들에게 항의를 받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그렇기에 동영상은 해외언론에 보도되어 크게 화제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검열로 삭제되어 현재는 찾을 수 없다.

이처럼 리창 총리는 코로나19 사태 시기에 제1 과제였던 방역에 성공하지 못했고, 인민들 앞에서 위신마저 깎였다. 중국에서 정치 지도자로서는 더할 수 없는 약점이다. 그럼에도 시진핑 주석의 신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향후 리 총리의 행보가 시 주석의 의중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이와 달리 일부 중화권 언론에서는 확실한 경제 실적을 내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리 총리에게 시 주석이 어느 정도 재량권을 주지 않겠냐는 전망도 내놓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침체된 중국 경제를 되살리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 총리가 재임하는 동안 한반도 문제에 대해 그가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는 명확지 않다. 리 총리는 한 번도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지만, 한국과는 두 차례의 인연이 있다. 2005년 시진핑이 당시 저장성 당서기로 서울과 전라남도를 방문했을 때 수행했다. 2015년에는 저장성 성장으로 전남도를 다시 방문했다. 당시 전남 도지사로 리 총리와 회담했던 이가 이낙연 전 국무총리다. 이 전 총리는 리 총리에게 2005년 시 주석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의 사진첩을 선물했다. 이런 현실에 비춰볼 때 리 총리가 한국과는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크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