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재의 ‘국대 은퇴 시사’ 논란이 드러낸 한국 축구의 현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1 13:05
  • 호수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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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둥’도 지치면 휜다…소속팀 강행군에 장거리 이동 후 A매치 2경기 연속 풀타임, 체력 바닥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사령탑이 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3월 A매치 2연전을 통해 자신의 축구를 대한민국에 선보였다. 남미에서 브라질·아르헨티나 다음 가는 강호 콜롬비아·우루과이를 상대로 1무1패를 기록했지만, 클린스만이 지향하는 공격축구가 경기 내용에서 잘 표현됐다는 우호적 평가가 많았다. 손흥민(토트넘)·이강인(마요르카)·이재성(마인츠)·오현규(셀틱)·황인범(올림피아코스) 등 유럽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이 빛난 것도 반가운 요소였다.

그 와중에 3월28일 우루과이전 이후 예상치 못한 파장이 일었다. 수비진의 중심인 김민재(나폴리)가 대표팀 은퇴를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콜롬비아·우루과이와의 경기에 모두 풀타임 출전한 김민재는 각각 2실점을 했다. 특유의 빠르고 힘 넘치는 수비가 나왔지만 실점 장면에서 집중력이 결여된 모습이 보여 ‘김민재답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던 터였다. 

ⓒ뉴시스
손흥민(가운데)과 김민재(왼쪽에서 네 번째)가 3월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대한민국과 우루과이의 경기에서 2대1로 패한 후 아쉬워하고 있다. ⓒ뉴시스

“신중치 못한 발언” 본인 공식 사과로 마무리

A매치 2연전을 마친 김민재는 미디어를 만나는 믹스트존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멘털적으로 무너져 있는 상태다. 대표팀보다 소속팀에만 신경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취재진과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나온 말의 뉘앙스는 대표팀 은퇴까지 전제한 듯했다. 확대해석을 경계해야 했지만 김민재의 표현이 단순히 체력적·정신적으로 지친 것 그 이상으로 볼 여지는 충분했다. 

3월29일 오전 이탈리아로 출국한 김민재는 충격 발언의 후속 취재를 위해 공항에 나온 미디어 앞에서 말을 아꼈다. 그의 입장은 같은 날 오후 자신의 SNS 공식 계정에 올라왔다. 김민재는 “우선 저의 발언으로 놀라셨을 선수, 팬분들게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대표선수로서 신중하지 못한 점, 성숙하지 못한 점, 실망했을 팬, 선수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혼란을 야기한 점에 대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여기에선 대한축구협회와 이야기 중이라고 언급했던 내용까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전날 보도처럼 은퇴까지 의미한 발언은 아니라는 분위기였다. 팬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태극마크의 무게를 너무 가벼이 여긴 것 아니냐는 지적과 부담감을 털고 다시 일어서 달라는 응원이 댓글을 채웠다. 

김민재가 이번 3월 국가대표 소집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김민재는 시즌 말미로 오며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어 3월 소집은 제외해줄 것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신임 감독의 첫 경기에 핵심 선수인 김민재를 제외하긴 쉽지 않았다. 다른 유럽파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국내 평가전의 경우 중계권, 티켓 판매 등 흥행의 이해관계 역시 중요하다. 결국 긴 비행을 감내하며 한국으로 와 2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했다. 

문제는 소속팀에서 이어지던 혹사 우려가 대표팀에서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지난여름 이탈리아 세리에A 나폴리로 이적한 김민재는 적응 기간도 필요 없이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김민재의 강력한 수비가 뒷받침되자 나폴리는 압도적인 차이로 현재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나폴리 팬들은 ‘철기둥’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주며 김민재의 기량을 찬양 중이다. 세리에A 전체를 살펴도 센터백 중 가장 높은 평점을 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김민재가 없는 나폴리의 수비라인은 상상할 수 없다. 매 경기 그가 후방을 지켜야 승리 가능성이 올라간다.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이 로테이션을 가동할 때도 김민재는 예외였다. 기복 없는 그의 철벽 수비 덕에 나폴리는 세리에A와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만큼 선수의 체력 소모는 커져 갔다. 

시즌 전체 일정의 4분의 3 지점을 지나고 있는데 나폴리 소속으로만 벌써 35경기를 뛰었다. 이 중 31경기가 풀타임이다. 리그 27경기 중 26경기에 나섰고, 챔피언스리그는 8경기에 모두 선발출전해 7경기에서 풀타임을 뛰었다.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모두 경기당 출전시간이 87분을 넘는다. 시즌 중 센터백 파트너인 아미르 라흐마니가 부상으로 2개월가량 결장하는 바람에 그 공백까지 김민재가 온전히 짊어져야 했다.

김민재는 센터백으로는 드물게 경기당 10km가 넘는 활동량을 기록할 정도로 커버 범위가 넓다. 유럽에서도 경이롭다고 인정받는 운동능력이지만 올 시즌의 페이스를 다음 시즌에도 재현하는 건 무리라는 게 냉정한 분석이다. 그렇게 쌓인 부하가 카타르월드컵 당시 종아리 부상으로 터진 적도 있다. 

선수가 대표팀 소집 제외를 요청한 것도 결국 혹사로 인한 부상 재발을 피하기 위한 예방 차원이었다. 나폴리는 4월에 세리에A 리그와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해 7경기를 치른다. 3·4일 간격의 일정이 계속되는데 두 대회 모두 우승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 김민재는 최대한 그라운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흘 간격으로 A매치 2경기를 풀타임 소화하고 돌아가게 되면서 향후 살인적인 일정의 부담감이 더 높아졌다. 

 

선수의 헌신 못지않게 배려와 지원도 중요 

이번 논란에서 김민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선수가 처한 상황은 안타깝고 이해가 가지만, 과거와 현재의 다른 유럽파들도 비슷한 처지에서 묵묵히 대표팀 소집에 임하며 헌신해 왔기 때문이다. 대선배인 박지성은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대표팀에 합류하면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왔다. 현 대표팀 주장인 손흥민 역시 주변에서 혹사를 우려하지만 “나라를 위해 뛴다는 것은 항상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묵묵히 소화 중이다.

동시에 태극마크에 임하는 선수들의 헌신적 자세만 믿고 시대의 변화상을 읽지 못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사회 전체가 국가보다 개인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축구에서도 국가를 대표하는 영광 이상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과거에는 현역 선수 은퇴가 곧 국가대표 은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일찌감치 대표팀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많다.

유럽의 경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박지성의 동료로 맹활약했던 미드필더 폴 스콜스가 만 29세에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는 9년 후에야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 축구에서도 국가대표 은퇴 타이밍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박지성은 만 31세인 2011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물러났다. 기성용과 구자철은 만 30세인 2019년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두 선수는 4년이 지난 지금 K리그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10년 사이 대표팀에서 유럽파 비중이 높아지며 A매치를 위해 왕복 20시간 이상의 이동이 잦아지는 선수들의 고충도 부각된다. 경기의 경중에 따라 체력 부하가 큰 유럽파의 소집을 미리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령 손흥민이 스리랑카·미얀마·라오스와의 경기까지 소화하기 위해 아시아로 날아오는 것이 대표팀과 선수 양측에 필수적인지는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다. 오는 6월과 9월, 10월, 11월에도 대표팀 소집이 가능한 만큼 체력 소모가 큰 시기에는 핵심 선수를 보호하는 전략적 측면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선수에게 헌신을 기대하는 만큼, 멀리 내다보는 배려와 지원도 필요해진 한국 축구의 현실에서 김민재의 은퇴 시사 해프닝은 새 화두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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