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독일 원수 관계를 풀어낸 미래지향적 정치 리더십의 교훈 [쓴소리 곧은 소리]
  •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 (jpyoo@paran.com)
  • 승인 2023.05.14 08:05
  • 호수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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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 셔틀외교 성과와 아쉬움을 보면서 겹쳐지는 장면들
드골과 아데나워, 4년간 열 번 넘게 만나 ‘엘리제 조약’ 성사시켜

10여 년 전 독일 수도 베를린 거리에서 마주쳤던 인상적인 조형물이 하나 있다.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던 프랑스와 독일(서독)의 지도자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가 두 손을 맞잡은 조형물이다. 나도 자연스레 두 지도자의 맞잡은 양손에 내 손을 포개는 자세를 취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번 한일 정상의 셔틀외교 부활은 그때의 추억을 소환했다.

19세기 중후반 이후만 해도 보불전쟁과 1, 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인명·재산 피해를 주고받고, 땅따먹기와 문화재 약탈을 반복했던 두 나라인 만큼 보복이 또 보복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하기에 딱 좋은 조건에 놓여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양국 모두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국민을 설득해 실기(失機)하지 않고 관계 정상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시대가 위대한 지도자를 낳고, 위대한 지도자의 미래지향적 정치 리더십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드골은 1940년 프랑스의 치욕적 대독 항복 후 영국 땅에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흔히 민족해방운동 출신 지도자들이 그렇듯 독일에 대한 드골의 적대감은 누구 못지않았다.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들을 가혹할 정도로 청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일반 프랑스인처럼 드골은 독일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는 생각을 표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어지간하면 자신의 브랜드인 ‘반독(反獨)’만 내세워도 권력 유지에는 지장이 없던 상황이었다.

ⓒDPA 연합
1965년 6월,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 수도 본을 방문해 아데나워 전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 ⓒDPA 연합

그들은 국민 감정에 편승하지 않았다

에펠탑의 승강기 케이블을 절단함으로써 ‘히틀러에게 파리는 내줬지만, 에펠탑은 내주지 않았다’며 군색한 ‘정신 승리’나마 챙긴 프랑스로선 독일과의 화해가 내키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도 ‘콧대’ 하면 프랑스요, 그중에서도 드골 아닌가.

하지만 드골과 아데나워는 집권기가 겹치는 4년여 동안 열 번도 넘게 만나 1963년 화해협력 조약인 일명 엘리제 조약을 성사시켰다. 두 지도자는 교차 방문 때 상호 의전 원칙을 깨고 공항에 직접 영접을 나갈 정도로 통 큰 면모를 보였다. 이런 파격에 양국 국민이 놀라고 세계가 놀랐음은 물론이다. 아무리 영웅적 지도자라 하더라도 이런 파격은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미래지향적 정치 리더십이 만들어낸 관계 정상화는 드골에게 ‘프랑스의 영광’, 아데나워에게 ‘라인강의 기적’을 선사했으며, 그 업적의 수혜자는 결국 양국 국민이었다. 만일 두 나라가 과거에 얽매여 적대관계를 끊어내지 못했다면 유럽공동체(EC)를 거쳐 오늘날 유럽연합(EU)으로 귀결된 유럽 통합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격과 스타일이 판이한 두 지도자가 달라도 너무 다른 국민성과 적대의 역사를 뛰어넘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접었기 때문이다. 두 지도자는 국민 감정에 편승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혜안과 통찰력으로 결단을 내리고 국민을 설득했기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사람이든 국가든 아픈 과거를 잊지 못하는 법. 그러나 과거를 잊지 않는 것과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은 천양지차다.

 

‘박정희 친일 매국노’ ‘김대중 사쿠라’ 아냐

여기까지 말하면 사람들은 한일 관계와 불·독 관계의 차이, 역사 인식에 대한 독일과 일본의 큰 차이, 프랑스의 대미 견제 심리와 영국에 대한 불신(미국의 유럽 에이전트라는 의심) 등 수많은 반대 근거를 들이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965년 박정희의 정권을 건 한일 국교 정상화 결단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 거대 야당의 중시조 격인 김대중의 정치생명을 건 한일 수교 조건부 찬성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친일 매국노’라 비난받던 박정희와 ‘사쿠라’ 오명을 뒤집어쓴 김대중에게 지금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위대한 지도자들의 정치 리더십에는 미래지향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남아공의 만델라는 독재정권 아래서 27년간 투옥되었지만 “갈 길이 먼데 과거를 단죄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과거 청산을 최소화했다. 긴 세월 옥바라지를 했던 부인은 강경 보복 노선을 꺾지 않았기에 함께 갈 수 없었다.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던 부인과 ‘과거냐 미래냐’의 노선 차이로 이혼까지 감행한 만델라의 정치 리더십은 지도자의 주안점(主眼點)이 과거와 미래 중 어느 쪽이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도 마찬가지. 문화혁명 기간에 세 번 숙청, 네댓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그가 집권하자 많은 사람이 과거 청산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모택동 동지는 공이 7할이고 과가 3할이다”는 한마디로 과거를 정리하고 오로지 미래만 보고 경제 개발에 매진해 오늘날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자서전에서 등소평이 아니었으면 중국은 문혁 이후 내부 투쟁으로 인해 소련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도자의 미래지향적 정치 리더십 덕분에 오늘날 중국과 남아공이 온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릇 국가 지도자의 시선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해야 한다. 지도자는 정치적 이해타산을 넘어 미래 비전과 결단을 통해 국가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미래지향적 신한일 관계를 위한 윤석열 대통령의 모험적 결단은 성과와 함께 아쉬움을 남긴 채 현재진행형이다. 대통령 스스로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도…”라고 말할 정도로 당장은 정치적 손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 평화 안보체제 구축과 문화예술 등 소프트 파워 분야로의 신한일 관계 진화를 위해선 고단해도 뚝심 있게 가야 할 길이다. 다만 박정희, 김대중처럼 긍정적 반전을 이루기 위해선 명확한 비전 제시와 국민 소통 강화가 필수적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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