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징 커브 보란 듯 깬 손흥민, 그 뒤엔 부친 손웅정 있었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7 11:05
  • 호수 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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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영원한 것은 없다…항상 겸손하기 바란다”
주장 완장 찬 이후 토트넘 반등의 주역으로 재조명 

손흥민의 2022년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2021~22 시즌 23골을 터트리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에 등극하며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2022~23 시즌은 부진을 겪었다. 득점은 리그 18위에 해당하는 10골로 두 자릿수를 간신히 넘어섰다. 손흥민의 골 결정력이 반감되자 토트넘의 성적도 4위에서 8위로 추락했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은 고사하고 유로파리그 출전권도 챙기지 못했다.

유럽 언론들은 일제히 ‘에이징 커브(Aging Curve)’를 의심했다. 에이징 커브는 스포츠에서 선수가 나이를 먹으며 신체능력을 포함한 전반적인 기량이 급격히 하락 곡선을 그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폭발적 스피드에 기반한 침투와 드리블이 최대 강점인 손흥민이 서른 줄에 접어들며 운동능력이 감퇴한 것이 부진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실제로 손흥민은 전 시즌 대비 슈팅당 득점율이 10% 이상 줄었고, 드리블 성공률도 20% 가까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시즌보다 부상도 많았다. 챔피언스리그 경기 도중 상대 선수 어깨에 안면을 강타당해 눈가 주변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수술대에 올랐다. 5시즌 연속 3000분 이상의 경기를 소화하다 보니 스포츠 탈장까지 덮쳤다. 이는 지나친 복부 압력에 장기가 서혜부 쪽으로 돌출되며 통증을 일으키는데 격렬한 동작과 많은 운동량이 동반되는 축구 선수에겐 직업병 같은 부상이다. 탈장 증상이 손흥민의 스피드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게 대다수 의료진의 분석이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손흥민은 또다시 수술을 받고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손흥민과 부친 손웅정씨가 2016년 5월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EPA 연합

토트넘, 리더십 찬사 이어지자 장기 계약 준비

단지 한 시즌 부진했음에도 평가는 냉랭했다. 축구 이적 통계 매체인 ‘트랜스퍼마크트’는 9000만 유로(약 1250억원)에 달했던 손흥민의 몸값을 지난 6월 6000만 유로(약 830억원)로 수정했다. 전 세계 35위에 달했던 선수 가치는 88위로 급락했다. 2015년 토트넘 입단 후 8년간 쌓아올린 공든 탑을 흔드는 분위기였다.

새 시즌을 앞두고 손흥민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조용히 재기를 준비했다. 여름 이적시장의 주인공이었던 김민재(독일 바이에른 뮌헨)와 이강인(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같은 후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다. 해리 케인이 토트넘을 떠나 바이에른 뮌헨으로 향하며 EPL 최고의 콤비도 해체됐다. 홀로 남은 손흥민은 신임 감독인 엔지 포스테코글루 체제에서 다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팀 리빌딩을 추진하며 손흥민에게 주장 완장을 맡기는 깜짝 개혁에 나섰다. 그라운드 위의 퍼포먼스, 그라운드 밖의 리더십 양면에서 도전에 나서야 하는 손흥민의 2023~24 시즌이었다.

손흥민은 골로 먼저 답했다. 번리와의 EPL 4라운드에서 시즌 첫 골을 포함한 해트트릭을 완성하며 팀의 5대2 대승을 이끌었다. 개인 통산 7번째이자 4시즌 연속 해트트릭이었다. 4시즌 연속 해트트릭을 달성한 선수는 손흥민 외에 앨런 시어러, 로비 파울러, 티에리 앙리, 해리 케인 4명뿐이다. 환상적인 마수걸이 다음은 빅게임 유닛(큰 경기 해결사)이었다. 아스널과의 북런던 더비에서 멀티골로 무승부를 이끌었고, 리버풀과의 맞대결에서 자신의 유럽 통산 200호 골로 선제 득점을 터트리며 극적인 역전승의 발판을 놨다. 발동은 늦게 걸렸지만 최근 4경기에서 6골을 몰아치며 맨체스터 시티의 엘링 홀란(8골)에 이어 EPL 득점 2위로 올라섰다.

그라운드 밖의 리더십도 연일 찬사를 받고 있다. 토트넘 입단 8년 차인 손흥민은 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만 주장·부주장 같은 팀의 리더 그룹에 들었던 적은 없다. 토트넘은 잉글랜드, 프랑스, 벨기에 등 서유럽 국가 백인 선수 위주로 긴 시간 주장단을 구축하며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만들었다. 유럽 기준으로는 축구 변방인 호주 출신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그것을 과감히 깨는 개혁에 나섰다. 팀의 전면 쇄신이 필요한 상황에서 국적이 아닌 동료, 팬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선수를 주목했고 손흥민을 신임 주장으로 결정했다.

이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7년째 주장을 맡고 있는 손흥민은 준비된 캡틴이었다. 중요한 순간에는 개인주의가 튀어나오는 유럽·남미 선수들과 달리 배려와 양보에 익숙한 손흥민은 사분오열하던 팀을 하나로 묶었다. 긴 부진에 빠진 공격수 히샬리송을 향한 언론과 팬들의 질타를 앞장서 막아내며 용기를 복돋웠다. 결국 히샬리송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5라운드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2대1 역전승의 주역이 됐다. 경기 후 손흥민은 히샬리송을 밀고 나와 팬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게끔 유도했다. BBC를 비롯한 영국 언론들은 “토트넘은 감동을 주는 스타를 지녔다. 이전의 어떤 주장들도 하지 못한 역할을 손흥민이 하고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제임스 매디슨, 미키 판데펜, 마노르 솔로몬 등 새롭게 토트넘에 합류한 선수들은 일제히 손흥민의 리더십을 극찬했다. 판데펜은 “경기장 안에선 명확한 지시를 한다. 밖에서는 모두의 사기를 올려준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해리 케인이라는 상징적 존재의 이탈로 침울했던 토트넘은 손흥민의 이런 전방위적 활약으로 위닝 멘털리티를 회복했다. 10월5일 현재 7라운드까지 5승 2무를 기록, 선두 맨체스터 시티에 이어 승점 1점 차 2위를 기록 중이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전술, 운영 면에서 일대 개혁을 일으켰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중추 역할은 손흥민이다.

이렇게 득점 외의 새로운 가치를 증명하자 토트넘은 새로운 장기 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가 스트라이커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손흥민 영입을 검토한다는 보도까지 스페인에서 나왔을 정도다. 에이징 커브가 왔다는 비판이 득세하던 시기로부터 불과 3개월 만에 이뤄진 반전 드라마다.

손흥민과 부친 손웅정씨가 2016년 5월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손흥민과 부친 손웅정씨가 2016년 5월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친 손웅정, 아들에게 일희일비 않는 평정심 당부

이런 손흥민의 반등 뒤에는 부친 손웅정 감독의 통찰과 헌신이 숨어있다. 득점왕 등극 당시 세계적인 이슈가 됐을 때도 손웅정 감독은 아들의 자만을 경계했다. 그는 “(득점왕 등극이) 자랑스럽기보단 조심스럽다. 흥민이가 항상 겸손하길 바란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폼이 떨어질 날이 온다. 그걸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예상처럼 손흥민은 부상이라는 악재가 겹치며 1년 만에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그런 부진에는 반대로 덤덤한 반응을 보인 손 감독이었다. “농부의 심정을 지녀야 한다. 풍년이 와도 내년을 걱정하고, 흉년이 들어도 내년의 희망을 지녀야 한다”는 지론을 강조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꾸준히 자기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됐지만 손흥민은 프리 시즌과 시즌 중 아버지와의 개인훈련을 빠트리지 않는다. 한때 주목받는 프로 선수였지만, 순식간에 잊힌 선수로 은퇴한 아픔이 있는 손 감독은 “골은 운 좋게 터지지 않는다. 한 골에는 수많은 노력이 들어있다. 마치 저축을 하고, 그 돈을 빼서 쓰는 것과 같다”며 꾸준한 노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루 30cm씩 폭발적으로 자라는 대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생에 비유하는 손웅정 감독은 힘들수록 슈팅, 트래핑 등 기본으로 돌아갔다.

손흥민의 지난 시즌은 실패라고 규정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축구 커리어 전체에서 그 1년은 궤도 수정을 위한 작은 시행착오였다. 아버지가 알려준 통찰과 지혜의 길을 걷는 손흥민은 이립(而立)이라는 30세를 넘어 더 확고하게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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