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내려라, 부채 잡아라” 해도 시장은 거꾸로…尹정부 ‘호통’ 안 통한다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23.11.0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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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압박에도 식‧음료 업계 가격 줄인상
‘은행 때리기’ 나섰지만 가계대출은 증가

윤석열 정부가 국정운영 키워드 전면에 ‘민생’과 ‘물가안정’을 내세웠다. 정부 주도 하에 경기 침체를 방어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 각 부서 장관들은 연일 강도 높은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물가 안정을 위해서는 기업에 “가격 인상을 자제하라”고 공공연한 압박을 가하고 있고, 민생을 위해서는 은행권을 질타하며 서민 이자 부담 완화를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선 이 같은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실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정부 눈치를 보던 기업들이 속속 대열을 이탈하는 흐름이라서다. 원가 인상 압박을 이기지 못한 기업들은 가격 인상 행렬에 동참하고 있고, 가계부채는 오히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주부, 회사원, 소상공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는 모습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주부, 회사원, 소상공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는 모습 ⓒ 대통령실 제공

‘상생금융’ 압박하면서 “대출 옥죄라” 주문…은행권 ‘혼란’

2일 은행권에선 전날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은 너무 강한 기득권층’이라고 발언한 데 대한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은행 갑질이 심하다”며 “은행의 독과점 형태를 방치해선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한 소상공인의 발언을 전한 데 이어, 은행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재차 드러낸 것이다.

정부는 고금리 장기화 국면 속에서 은행이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지난 2월에도 윤 대통령은 “은행의 이자장사를 막으라”는 메시지를 낸 바 있다. 이후 금융당국은 ‘상생금융’을 주문하며 시중은행의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서민의 이자 부담 완화를 위해 은행권의 금리 수익을 나누자는 취지다. 이에 금융권은 4700억원 수준의 상생금융 대책을 집행해 보조를 맞췄다.

그러나 업계에선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금융당국이 동시에 “가계부채 관리”를 주문하고 있어서다. 당국은 급증하는 가계부채의 원인이 은행권의 무분별한 대출 행태에 있다고 보고 관리에 나선 상태다. 그 일환으로 은행권은 대출 억제를 위해 잇따라 금리를 올려왔다. 이런 국면에 상생금융을 도입하려면 대출 금리를 낮출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다시 가계부채로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 가계부채는 증가세에 있다. 지난달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685조7820억원으로, 9월 말(682조3294억원)과 비교해 3조원 넘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당국의 메시지가 엇박자를 보이면서 정책이 실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일관성 없는 정부의 개입으로 인한 잠재적인 손실은 은행 문턱을 높여 금융취약계층에 피해가 전가되고 고통의 악순환을 양산한다”고 비판했다.

4월28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 주류코너에 소주가 진열돼 있다. 소주 시장 1위인 하이트진로는 5월1일부터 '참이슬' 소주의 공장 출고가격을 6.45% 인상한다. ⓒ 연합뉴스
한 대형마트 주류코너에 소주가 진열돼 있다. ⓒ 연합뉴스

‘가격 인상 자제’ 호소에도 서민물가 ‘줄인상’

식품‧음료‧화장품 등 일부 업계에선 정부의 기조에 반기를 든 사례도 나온다. 정부는 연일 ‘민생 부담’을 호소하며 ‘가격 인상 자제’를 압박하고 있지만, 다수 기업들은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속속 가격을 조정하고 나섰다.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소주와 맥주부터 햄버거와 일부 화장품 브랜드도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통상 업체 한 곳에서 가격을 올릴 경우 경쟁사들도 뒤이어 가격을 인상하는 경향을 보이는 터라, 향후 ‘릴레이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맥주시장 1위 오비맥주가 출고가 6.9% 인상을 결정하자 소주업계 1위 하이트진로도 소주와 맥주의 출고가를 6%대 인상하기로 했다. 서울우유가 유제품 가격을 인상하자 매일우유, 남양유업 등도 일제히 가격을 조정했다.

일각에선 가격 인상 행렬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상반기 정부의 ‘물가 안정’ 호소에 동참했던 라면과 과자, 빵 등 업체들도 가격 인상을 저울질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편 물가를 잡기 위한 당국의 메시지는 더욱 날카로워지는 흐름이다. 지난달 20일 한훈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식품업계 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부 원료 가격 상승에 편승한 부당한 가격 인상을 자제하는 등 물가 안정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일부 기업의 가격 인상을 ‘부당하다’고 꼬집은 것이다. 윤 대통령은 2024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정부는 물가와 민생 안정을 모든 정책의 최우선에 두고 총력 대응하겠다”며 “범정부 물가 안정 체계를 가동해 장바구니 물가 관리에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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