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살균제’ 가해 기업에 ‘500만원’ 첫 배상책임…“최악 참사”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3.11.0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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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참사 공론화 12년 만에 기업 민사 배상 책임 인정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자 약 8000명…추가 소송 이어질 듯
10월30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신청자는 6892명으로 이 중 1566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가습기 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이 생전에 쓰던 장난감과 인형 등 유품들 ⓒ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 - 빼앗긴 숨' 온라인 전시관 제공
가습기 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이 생전에 쓰던 장난감과 인형 등 유품들이 놓여 있다. ⓒ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 - 빼앗긴 숨' 온라인 전시관 제공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 대한 제조·판매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공론화 된 지 12년 만이다. 사법부가 기업의 민사 배상 책임을 최초로 인정하면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가 잇따를 전망이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김아무개씨가 제조·판매사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납품업체 한빛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의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9일 확정했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제조물 책임에서의 인과관계 추정, 비특이성 질환의 인과관계 증명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2007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약 5년 간 옥시에서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당번'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2013년 5월 간질성 폐 질환 등의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진단 내용을 근거로 정부에 피해신청을 접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김씨의 경우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질환 가능성이 낮다며 2014년 3월 3등급 판정을 내렸다. 3등급은 가습기 살균제 노출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다른 원인을 고려할 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질환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다.

당시 정부는 피해자들의 폐손상에 대해 1~4단계로 등급을 나눴다. 정부는 1·2단계만 피해자로 인정했고, 3단계(관련성 낮음)와 4단계(관련성 없음)는 피해구제 대상에서 제외했다. 

3월31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근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문제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가습기살균제합의를위한피해자단체 관계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3월31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근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문제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가습기살균제합의를위한피해자단체 관계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이에 김씨는 2015년 2월 옥시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2000만원의 피해 배상을 청구한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는 항소하며 손배청구액을 3000만원으로 조정했고, 2심 재판부는 이 중 500만원의 기업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019년 9월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들이 제조·판매한 이 사건 가습기 살균제에는 설계상 및 표시상의 결함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원고가 신체에 손상을 입었다"며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김씨의 진료소견서와 옥시 관계자들의 유죄 판결, 질병관리본부 실험 결과 등을 토대로 "이 사건 가습기살균제에 하자가 있었다는 것을 추단할 수 있고 원고가 정상적인 용법으로 사용했는데도 신체에 손상을 입은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제조사가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등 문구를 이용해 제품의 유해성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점도 손해배상 책임으로 인정됐다.

김씨와 옥시, 한빛화학은 항소심 판결에 모두 불복했으나 대법원은 2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보고 이날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가 제조·판매업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한 민사소송 중 첫 상고심 사건 판결"이라며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그로 인한 질환의 발생·악화에 관한 인과관계 유무 판단은 사용자의 구체적인 증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회원들이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과 피해대책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회원들이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과 피해대책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피해자 7859명 중 1828명 사망…옥시·애경 ‘추가 분담금’ 거부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2011년 원인불명의 폐 손상을 겪는 영유아와 임산부 등이 속출, 보건당국이 역학조사에 착수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국 조사 결과 1994년부터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사망자와 폐질환자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독성물질이 함유된 가습기 살균제 사용 위험성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고, 그 사이 기업은 '인체 무해' 광고를 내걸고 제품을 판매했다. 

가습기살균제사건 특별조사위원회가 파악한 1994년부터 2016년까지 판매된 가습기 살균 제품은 995만여 개에 달한다. 원료 공급과 제조·판매에 관련된 기업은 총 100여 곳으로, 48종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이 출시됐다. 

지난 8월 기준 파악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7859명으로, 이 중 1825명은 목숨을 잃었다. 

정부는 2014년 3월 공식 피해 판정을 내려 구제에 나섰다. 그러나 옥시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던 김씨처럼 3·4단계 피해자에 대한 구제에 한계가 있었고, 2017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천식과 간질성폐질환, 폐렴, 기관지확장증 등으로 인정범위가 확대됐다. 김씨도 2017년 피해구제대상자로 인정됐다. 

당시 피해자들의 치료를 위해 쓰이는 피해분담금이 조성됐고 가해 기업인 옥시와 애경 등 18개 기업이 1250억원을 냈다. 정부도 225억원을 지원했지만 피해자가 많고 치료 범위가 넓어 초기 조성한 기금은 바닥이 났다. 

정부는 지난 5월 옥시로부터 704억원, 애경으로부터 100억원의 추가 분담금을 걷었다. 애경은 이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옥시는 '더 이상의 분담금은 낼 수 없다'는 입장을 정부에 통보했다.  

6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4월6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들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딘 사법 판단…"가해 기업 책임 너무 적어"

형사 사건은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성분에 따라 유무죄가 엇갈렸다.

옥시가 제조한 가습기 살균제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나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포함했는데, 법원은 피해자들의 사망과 인과관계를 인정해 신현우 전 옥시 대표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2018년 1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반면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이 들어간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은 2021년 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피해 사실과 해당 성분과의 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에 대한 항소심 선고는 내년 1월11일 나온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기업의 책임을 묻는 첫 확정 판결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가해 기업의 책임치고는 너무 적다"며 "이번 판례를 딛고 제대로 된 피해배상이 인정되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소장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지 12년이 지나고 있다. 사법적 판단이 너무나 느리다"며 "최악의 환경 참사이자 소비자 피해 사건인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대해 앞으로 법원이 사법정의를 구현해 문제해결의 초석을 놓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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