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쿠바 수교 모른 채 푸틴과 샴페인 터뜨린 김정은의 절치부심 카드는…
  • 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2.25 12:00
  • 호수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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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 정상회담에 무게 실을 가능성 커…모종의 도발 시나리오 마련됐을 것이란 관측도

북한의 마약 운반을 의심해 화물선 청천강호를 억류한 파나마 당국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만 개가 넘는 설탕 포대를 들춰내자 밑으로 25개의 컨테이너가 드러났고, 동체 일부를 분해한 미그21 전투기 2대와 미사일·차량 등이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박의 출항지는 쿠바, 도착항은 북한의 남포항이었다.

2013년 7월 벌어진 청천강호 사건은 은밀한 무기 거래를 포함한 북한과 쿠바의 밀착 관계를 그대로 보여줬다. 녹슨 선체와 설탕 무게에 내려앉은 컨테이너 천장, 노후한 전투기는 대북제재와 경제난 속에 근근이 버텨내는 북한과 쿠바의 현실을 또렷하게 보여줬다. 한반도와 북미대륙 남단이란 지리적 이격에도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의 끈끈한 유대를 확인케 한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가 2018년 11월5일 노동당 본부청사로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부인 리스 쿠에스타 여사를 초청해 담화와 만찬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부부가 2018년 11월5일 노동당 본부청사로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부인 리스 쿠에스타 여사를 초청해 담화와 만찬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연합뉴스

북 외교관 등 엘리트층 동요 불러올 수도

사실 북한과 쿠바는 혈맹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쿠바 공산혁명의 지도자로 불리는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 정권이 수립된 1960년 평양을 찾아 김일성과 만났다. 최고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도 1986년 방북했다. 북한은 카스트로에게 소총 10만 정을 지원할 정도였다.

이런 기류는 김정은 집권 이후까지 이어졌다. 2018년 방북한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당시 국가평의회 의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는데, 노동신문은 이를 “두 나라 친선관계를 영원히 계승해 나가려는 확고한 의지를 과시한 분수령”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볼을 부비며 사회주의식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 ‘영원’을 약속하는 듯했다. 2월1일에도 김정은은 쿠바 혁명 65주년 축하 전문을 디아스카넬 대통령에게 보냈다.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2월14일 밤 한국과 쿠바가 전격적으로 수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김정은 입장에선 금석맹약을 다지던 쿠바의 ‘배신’이자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한국은 오랜 기간 공들여온 쿠바와의 국교 수립으로 대(對)사회주의권 외교의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는 의미가 있지만, 북한에는 외교 참사에 가까웠다.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의 함구는 김정은과 평양 지도부를 때린 한-쿠바 수교의 충격파를 짐작하게 한다. ‘쿠바’라는 단어는 사라졌고, 외교적 항의 등 반발 움직임조차 없는 상황이다. 1992년 한중 수교 때 파장에 못지않은 쇼크를 받았을 것이란 진단까지 나온다. 이번에 북한은 한-쿠바 수교 관련 동향을 전혀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쿠바가 이를 북한에 사전에 통보해 줬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이런 경우 쿠바와 북한 간 알력이나 소통 내용이 짤막하게라도 알려지는데 이번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고 귀띔했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김 위원장일 수밖에 없다. 한·미·일 대북공조에 맞서 북·중·러 동맹을 챙기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틈타 푸틴 대통령과의 무기 밀거래로 외교적 공간을 넓혔다고 여겼는데 정작 믿었던 쿠바에 일격을 당한 것이다. 지난해 9월 푸틴과 보스토치니 우주센터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샴페인을 터트리는 국면의 다른 한편에선 한-쿠바 간 수교 논의가 무르익고 있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칠 수도 있다. 쿠바와 단교라도 선언하고 싶을 텐데 뒷감당이 만만치 않다. 뉴욕 유엔대표부의 북한 외교관이나 최선희 외무상을 당장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수도 있다.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는 절치부심하면서 사태 수습에 안간힘을 쓸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한-쿠바 수교가 북한 외교관 등 엘리트 계층과 주민들의 동요나 체제 이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걱정거리다. 의미 있는 수준의 교역이나 협력·교류가 없었지만 그 상징성을 생각할 때 쿠바의 이탈은 북한 체제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불러올 공산이 크다는 측면에서다. 2월19일자 노동신문이 1면 사설에서 “우리 혁명은 20세기와 21세기의 격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사회주의의 진정한 본태를 고수했다”고 주장한 건 속앓이하는 김정은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양새다.

 

김정은의 서해 NLL 무력화 발언 눈길 쏠려

일단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와 북·일 정상회담에 무게를 실을 가능성이 있다. 10%대를 보이는 지지율 급락에 국면 전환이 절실한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상황을 볼 때 김정은이 결심만 한다면 언제든 국장급 비밀접촉을 거쳐 정상회담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2월15일 담화에서 “두 나라가 가까워지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수상(기시다)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 건 이런 분위기를 드러낸 것이다. 납치 일본인 문제 해결 등의 조건이 걸림돌이 돼왔지만 북한이 필요로 한다면 결정적 장애가 되긴 어렵다는 쪽으로 외교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연초부터 남북관계를 ‘적대(敵對)’로 규정하면서 ‘국가 대 국가’ 운운하는 대립각을 세워온 김정은이 핵·미사일 도발이나 화풀이성 국지전을 감행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특히 남한의 4월 총선과 한미 연합훈련 시즌을 맞아 이에 맞대응하려는 차원의 무력시위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김정은이 직접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력화 발언을 쏟아낸 점에 눈길이 쏠린다. 그는 2월14일 노동당 군사부문 간부와 해군 고위 지휘관과 함께 신형 지대함 미사일 사격을 참관한 후 “한국 괴뢰들이 국제법적 근거나 합법적 명분도 없는 유령선인 북방한계선이라는 선을 고수해 보려고 발악하며 3국 어선 및 선박 단속과 해상순찰과 같은 구실을 내들고 각종 전투함선들을 우리 수역에 침범시키며 주권을 심각히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제는 우리가 해상주권을 그 무슨 수사적 표현이나 성명·발표문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력행사로, 행동으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북한 관영매체들이 김정은의 언급과 관련해 “특히 적들이 구축함과 호위함, 쾌속정을 비롯한 전투함선들을 자주 침범시키는 연평도와 백령도 북쪽 국경선 수역에서의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는 데 대한 중요지시를 내렸다”고 밝혀 모종의 도발 시나리오가 마련됐을 것이란 관측도 대두하고 있다.

한-쿠바 수교로 심란해할 김정은 위원장을 달래줄 선물이 2월18일 평양에 도착했다.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전용차량과 같은 ‘아우루스’를 보낸 것이다. ‘러시아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이 차량은 무게 7톤에 6cm 방탄유리와 장갑을 갖추고 있고 대당 1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러 정상회담 때 푸틴 전용차량에 오른 김정은은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갖고 싶다’는 사인을 강하게 보냈다. 

차량을 인도받은 김여정은 “두 나라 수뇌분들 사이에 맺어진 각별한 친분관계의 뚜렷한 증시로 되며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것도 각별할 것도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한-쿠바 수교는 김정은에게 북한 외교의 현주소를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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