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내 죽음의 책임을 물어 달라”
  • 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11 10:00
  • 호수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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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비나 기자를 분신자살로 내몬 ‘경찰국가’ 러시아의 언론 탄압 참상

“러시아 정부에 내 죽음의 책임을 물어 달라.” 10월2일 금요일 오후, 러시아 제5 도시 니즈니노브고로드 경찰본부 앞에서 분신자살한 이리나 슬라비나(Irina Slavina) 기자가 페이스북에 남긴 유언이다.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그의 소식은 러시아 야권과 언론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러시아 독립 언론매체 ‘KozaPress’ 편집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날 새벽 6시 경찰의 자택 압수수색으로 괴로웠던 상황을 전했다. 그는 야권, ‘오픈 러시아’와의 관계를 밝히고자 유인물 등을 찾던 경찰이 그의 컴퓨터·핸드폰뿐만 아니라 딸의 컴퓨터 및 남편의 핸드폰까지 압수했다고 적었다. 러시아 당국은 ‘오픈 러시아’를 “바람직하지 않은” 단체로 규정하고 있고 최근 대표인 안드레이 피보바로프를 집시법 위반으로 여러 차례 구속한 바 있다. 이 단체는 반푸틴 성향의 망명한 러시아 억만장자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왔다. 

슬라비나 기자의 딸 마르가리타는 어머니의 분신 다음 날 거리에서 “우리 엄마가 산 채로 불타는 동안, 당신은 침묵했다”는 내용의 피케팅을 했다. ⓒ페이스북

1993년 이후 살해·실종 언론인 300명 넘어

수많은 사람의 추모글이 쏟아지는 가운데, 야권 정치인이자 언론인 레브 슬로스버그는 ‘경찰국가가 슬라비나를 자살로 몰았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사람들은 종종 경찰국가의 정의를 묻는데, 이는 자유와 인권을 파괴하는 것이 주요 임무인 나라”라며 “이 외에도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죽이는 살인마 국가가 경찰국가”라고 비평했다. 또한 그는 “모욕을 주는 것도 경찰국가의 주요 스타일”이라며, 슬라비나 기자가 2015년 크렘린 근처에서 총격당한 대표적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를 추모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3월 2만 루블의 벌금형을 받았고, 새로 건립된 스탈린 기념비를 비판한 페이스북 포스팅으로 인해 같은 해 10월 7만 루블의 벌금형을 받은 법적 근거는 “권력과 사회에 대한 무례”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슬라비나 기자의 자살은 하루아침에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올여름 6390달러(약 750만원)의 벌금형까지 받은 슬라비나 기자는 이를 “재정적 살인”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올해 러시아는 ‘언론의 자유지수’를 집계한 총 179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인 149위를 차지했다. 러시아의 열악한 언론 상황은 살해 및 고소, 압수수색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론인 탄압 이외에도 2014년 매스미디어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한 입법이 큰 요인으로 평가된다. 2009년 국제기자연맹(IFJ)의 보고서에 의하면, 1993년 이래 살해 및 실종된 러시아 언론인은 무려 300명을 넘는다. 이 외에도 2011년과 2012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 이후 독립 언론에 대한 압박이 커지는 가운데 웹사이트 차단, ‘반극단주의법’을 선택적으로 적용한 언론인 구속, ‘외국의 첩자’라는 프레임 씌우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의 인터넷 장악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푸틴 정부에 비판적인 탐사보도 매체인 ‘노바야 가제타(Novaya Gazeta)’는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례로, 1993년 창립 이래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나탈리아 에스테미로바 등 5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2007년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던 에스테미로바 기자 및 인권활동가는 2년 후 체첸에서 납치돼 변사체로 발견되는 비운을 맞았다.

2006년 10월 모스크바 자택에서 총격당한 폴리트코프스카야 기자는 러시아 언론인 고난의 상징이다. 제2차 체첸 전쟁 중 살인·고문·납치 등 전쟁의 참상을 주로 다뤘던 그는 스웨덴·미국 등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한 저명한 언론인이자 열정적인 인권활동가였다. 그는 생전 “내가 선택한 삶은 독약 테러, 체포, 전화 살인협박, 매주 검찰 소환 등으로 점철돼 있으며, 이런 삶이 역겹게 느껴진다”고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살해 소식은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1980년대 KGB 요원으로 활동했던 푸틴 대통령은 사건 며칠 후 드레스덴 방문 때 “살인자”라고 야유하는 시위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이 살인 사건이 푸틴 대통령 생일에 발생한 사실은 ‘푸틴을 위한 선물’이었다는 세간의 풍문을 부추겼다. 

이리나 슬라비나 기자의 생전 모습 ⓒ페이스북

“크렘린이 언론인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자신의 저서 《푸틴의 러시아: 쇠퇴하는 민주주의에서의 삶》을 통해 “푸틴은 러시아의 어두웠던 첩보활동 결과물로, 자신의 출신 한계를 넘지 못하고 KGB 요원처럼 계속 행동한다”고 그의 독재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사망 후, 모스크바 HSE대학의 에브게니아 알바츠 정치과학 교수는 “KGB는 1990대 초 다수의 부서로 분리됐을 뿐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특히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개혁은 포기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KGB는 정치적 기관으로서의 역량을 회복했고 구소련 때와 달리 비밀첩보활동은 이제 큰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스탠퍼드대 마이클 스펙터 교수도 푸틴이 정보기관의 재기에 큰 힘을 실어주었고, 현재 러시아의 리더 격 정치인들의 다수는 정보기관 출신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2006년 7월 러시아 국회는 해외에 있는 ‘러시아 정부의 적’ 살해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입법은 크렘린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마이클 스펙터 교수는 ‘푸틴 정권하의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의 뉴요커 기고글을 통해 푸틴 정부의 언론 장악 과정의 역사적 배경을 분석한 바 있다. 이를 보면, 구소련 해체 과정에서 옐친 정권하의 러시아는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옐친의 경제개혁은 실패했고, 제1차 체첸전쟁은 수만 명의 러시아 및 체첸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TV방송으로 생생하게 전해진 전쟁의 참상은 반전 여론을 이끌었고, 1996년 당시 대선을 앞둔 옐친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쳤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지 불과 5년 만에 다시 공산당의 승리가 예상되자 지배세력은 큰 위기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얻은 언론의 자유를 포기하기 싫었던 유력한 언론세력과 경제세력은 동맹관계를 도모한다. 엄청난 재정 지원의 대선 캠페인과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TV방송 결과, 옐친의 지지율은 2%에서 54%로 극적인 반등을 이루며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NTV의 전 앵커 안드레이 노르킨은 “정부 당국은 매스미디어가 어떤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아주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챘다”며 “1996년 대선은 ‘땅에 독성이 있는 씨를 뿌린 것’으로 크렘린이 언론인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슬프게도 푸틴 시대에 일어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푸틴 집권 직후 주요 TV방송국들은 국가 소유로 전환됐고, 대규모 신문사들도 지방정부 또는 크렘린에 충직한 사업가들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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