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후계자는 곧 시진핑…“장기집권” 예고에도 잠잠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7.14 08:00
  • 호수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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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경축식에서 “장기집권” 예고
반대 세력도, 반대 여론도 ‘잠잠’

7월1일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경축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결기에 차 있었다. 65분 동안 꼿꼿이 선 채 기념 연설을 했다. 그는 근대 이후 중국이 외세의 침략으로 핍박받았던 역사를 회고했다. 그런 다음 “어떤 외국 세력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압박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누가 그런 망상을 하면 14억 중국인의 피와 살로 만든 강철 만리장성 앞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개혁개방 이래 중국 최고지도자가 공개 석상에서 외세를 겨냥해 내놓은 가장 강력한 경고장이었다.

‘어떤 외국 세력’을 뚜렷이 명시하지 않았으나, 미국이 분명했다. 실제로 시 주석은 대만과 홍콩 문제를 거론했다. 특히 대만에 대해서는 “조국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임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만의 독립 도모를 단호히 분쇄하겠다”고 다짐하며, 미국을 겨냥해 “중국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이 적극적으로 대만에 접근하고 있는 데 대한 불쾌감이었다.

ⓒXinhua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인 7월1일 수도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시진핑(習近 平) 국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경축 연설을 하고 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 서 중화민족이 당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대내외에 선언했다. ⓒXinhua

10년 임기로 물러나지 않을 듯

이런 상황 아래 시 주석의 연설 내용은 세간의 전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치 전쟁을 앞둔 지도자처럼 살벌한 단어와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게다가 향후 행보에 대한 역사적 사명까지 부여했다. 뒤이어 국제무대에서는 우군 다지기에 나섰다. 7월6일 세계 정당 지도자들과 정상회의를 열어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자신의 가치나 체제를 이식하려는 점을 비판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성공한 공산당의 업적을 자찬했다.

창당 100주년 경축대회 이후 시 주석이 쏟아내는 일련의 발언은 집권 9년 차로 접어든 지도자답지 않았다. 마치 집권 청사진을 선보이는 것처럼 패기가 넘쳤다. 주드 블랑쉐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권력에서 조만간 물러날 예정인 지도자의 연설이 아니었다”고 꼬집을 정도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최고지도자의 임기는 10년이었다. 또한 최고지도자가 맡는 직책은 세 가지로 정해졌다.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정·군을 대표한다. 이런 골격은 덩샤오핑(鄧小平)이 갖춰놓은 시스템이었다.

다만 설계자인 덩샤오핑은 예외였다. 그는 공식적으로 1978년 집권해 1990년 퇴임했다. 임기 중 맡은 최고 직책은 중앙군사위 주석이 유일했다. 국가주석과 총서기 직은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덩샤오핑이 그랬던 이유는 마오쩌둥(毛澤東)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사회주의정권 수립 이전부터 공산당 주석이었다. 수립 이후에는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이 됐다. 게다가 1976년 죽을 때까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1인 장기독재로 인한 폐해를 톡톡히 경험했다. 1966년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은 중국과 덩샤오핑 모두에게 재난이었다.

그렇기에 덩샤오핑은 권력 집중화와 장기집권에 거부감이 있었다. 권력은 표면적으로 집단지도체제로 분점했고 집권 13년 차에 물러났다.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은 1989년 총서기, 1990년 중앙군사위 주석이 됐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영향력 아래서 후계자 수업을 했다. 1992년 덩샤오핑이 주도한 남순(南巡)강화와 전면적인 개방정책 채택을 그저 지켜만 봤다. 장쩌민이 실질적으로 집권한 것은 1993년 국가주석으로 취임하고부터다. 이때부터 덩샤오핑이 남긴 시스템이 작동했다. 장쩌민은 2002년과 2003년 각각 총서기와 국가주석 직을 후임자인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물려주었다.

군권을 쥐고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서 사임했다. 후진타오에 이르러 시스템은 완전히 정착됐다. 후진타오는 2012년 총서기, 2013년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시진핑에게 물러준 것이다. 이런 전통대로라면 시 주석은 내년 10월 개최되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총서기 직을 후계자에게 물려줘야 한다. 덩샤오핑이 남긴 또 다른 불문율인 ‘칠상팔하(七上八下)’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칠상팔하’는 67세까지는 유임하고 68세에는 은퇴하는 원칙이다. 금세기 들어 덩샤오핑의 유지에 따라 이 전통은 철저히 준수됐다.

그러나 최근 시 주석의 발언과 행보는 ‘시진핑의 후계자는 곧 시진핑’이라는 점만 부각시키고 있다. 경축대회 연설은 왜 자신이 앞으로 5년 이상 최고지도자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펴는 무대 같았다. 7월5일에는 4명의 상장(上將, 한국군의 대장에 해당)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승진한 상장은 육군사령관·남부전구사령관·서부전구사령관 등 향후 군부를 책임질 50대 중후반이었다. 현재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위원은 모두 70세를 넘었거나 60대 후반이라 내년에 은퇴해야 한다. 따라서 후계자가 처리해야 할 군부의 승진 인사를 시 주석이 미리 해버린 격이다.

물론 떠오르는 후계자가 없는 건 아니다. 후춘화(胡春華) 부총리, 리창(李强) 상하이시 당서기, 천민얼(陳敏爾) 충칭(重慶)시 당서기, 장칭웨이(張慶偉) 헤이룽장(黑龍江)성 당서기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들이 2023년 시 주석에게 권력을 완전히 물려받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없다. 중국은 2018년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의 3연임 제한을 폐지했다. 따라서 일부 중화권 언론은 시 주석이 공산당 총서기 직은 후계자에게 넘겨주되,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은 계속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덩샤오핑의 유지는 어느 정도 따르면서 권력은 지키려는 모양새다.

 

장·노년층은 ‘장기 독재체제로의 회귀’ 우려

이런 권력 이양 방식은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이미 경험했다. 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막을 세력은 전무하다. 후계자로 손꼽히는 이들 중 후 부총리를 제외하고 모두 ‘즈장신쥔(之江新軍)’ 인맥이다. 즈장신쥔은 시 주석이 2002~07년 저장(浙江)성 당서기로 일할 때 인연을 맺은 부하들이다. 과거 권력을 양분했던 장쩌민의 상하이방은 숙청됐고, 후진타오의 공청단(共青團)파는 지지멸렬하다. 공청단파 중 후 부총리 외에 눈에 띄는 인사가 없다. 권부에는 오직 시 주석의 측근 세력인 ‘시자쥔(習家軍)’만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대다수 2030세대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마오쩌둥의 1인 장기집권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게다가 시 주석의 국정이념인 ‘중국몽(中國夢)’에 열광하고 있다. 실제로 상하이에서 국영기업에 다니는 양리주안(27)은 필자에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끄는 시 주석의 강력한 리더십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문화대혁명의 광란을 경험했던 일부 장년층과 노년층은 우려하고 있다. 대학교수 직에서 은퇴한 장젠궈(가명·84)는 “마오쩌둥의 1인 장기집권 시절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가끔씩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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