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형 재벌 줄고, 창업형 부자 늘었다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1.09.29 10:00
  • 호수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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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대 상장기업 오너 일가 지분 가치 변화 전수조사 결과
코로나19 특수 누린 IT플랫폼·바이오·게임 기업 상종가

우리 경제의 내일을 책임질 상장사 경영인의 지분 가치는 얼마나 될까. 시사저널은 이런 궁금증을 안고 매년 기업 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의뢰해 관련 조사를 해오고 있다. 올해 9월10일 기준으로 500대 상장기업 오너 일가 500명의 지분 가치를 분석한 결과, 1조원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오너 일가는 28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가운데 삼성가·현대차가·카카오 등이 가장 높은 지분 가치를 기록하면서 차례대로 금·은·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일러스트 신춘성

특히 올해의 경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재계의 판도가 크게 흔들렸다. 코로나19 특수를 누린 신흥 기업 오너들은 주식 부호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반면, 전통 대기업 오너는 상당수가 순위에서 크게 밀려났다. 상속형 재벌이 줄고, 창업형 부자가 늘어난 것이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현재 전통 대기업들은 세대교체가 많이 이뤄졌다. 상속 과정에서 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반대로 코로나19를 거치면서 IT 플랫폼·바이오·게임 기업들이 급성장했고, 창업자들의 지분 가치는 크게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상장사 오너들의 보유 주식 가치는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500대 상장기업 중 353사가 전년에 비해 주식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코로나19 특수로 파죽지세를 달리고 있는 신흥 기업들의 주식 가치도 일제히 떨어졌다. 박 대표는 “지난해 초 코로나19로 주가가 폭락했지만, 이후 올해까지 주가는 역대 최고점을 찍었다”며 “이 점을 감안하면, 오너들의 보유 주식 가치가 크게 하락한 건 아니다. 현재는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삼성가·현대가·카카오 順 금-은-동메달

올해 보유 주식 가치 1위는 예상대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필두로 한 삼성그룹 일가(37조2199억원)가 차지했다. 이 부회장은 명실상부 국내 제1의 주식 부호(1위·14조5191억원)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2위·10조3345억원),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4위·6조1831억원),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5위·6조1831억원) 등이 보유한 주식 가치의 총합도 22조700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처지다. 지난해 대비 삼성물산·삼성전자의 주식 가치는 각각 8.02%, 8.28% 하락했다. 삼성전자 주가는 10만원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8월14일 이 부회장이 가석방되면서 이날 주가는 오히려 3.3%(종가 7만4400원) 곤두박질쳤다. 현재도 삼성전자 주가는 7만원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지지부진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홍콩계 증권사 CLSA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부진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2위에는 현대자동차그룹 일가(9조1429억원)가 올랐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6위)이 보유한 현대차 등의 주식 가치는 5조4632억원이며, 정의선 현대차 회장(8위)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등의 주식 가치는 3조6796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와 현대글로비스 역시 전년 대비 주가가 하락했지만, 상대적으로 선방하면서 정 회장의 지분 가치 순위는 오히려 1단계 상승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도 걱정이 큰 상황이다. 코로나19와 반도체 공급난 등으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현대차에 따르면, 지난 8월 국내외 완성차 판매량은 지난해 동월보다 7.6% 감소한 29만4591대에 그쳤다. 판매 실적 감소는 코로나19 확산과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울산을 비롯해 국내외 공장들이 가동 중단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장세를 멈춘 국내 자동차 시장 속에서 현대차는 경형 SUV ‘캐스퍼’를 출시하는 등 돌파구 찾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김범수, 상장사 오너 중 지분 가치 3위 등극

3위에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7조6861억원)이 등재되면서 재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김 의장이 보유한 카카오의 주식 가치는 전년 대비 12.16% 하락했다. 그럼에도 지난해 조사에서 3위를 기록한 구광모 LG 회장의 주식 가치(12위·2조5989억원)를 크게 웃돌았다. 김 의장의 처남인 형인우 스마트앤그로스 대표가 보유한 카카오 주식 가치도 3056억원을 기록하면서, 97위에 올랐다.

김 의장의 약진은 수십 년간 굳어져온 국내 전통적인 재벌 기업 체제를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카카오는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언택트로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카카오는 쇼핑·간편결제·콘텐츠·플랫폼 사업 등으로 크게 선전하고 있다. 카카오는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몸집도 키웠다. 공정거래위원회 대기업집단 소속 회사 변동 현황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카카오가 인수·합병한 기업은 최소 93곳으로 김 의장은 대기업 총수 반열에 올랐다.

이런 김 의장의 행보에 급제동이 걸렸다. 최근 카카오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골목상권’ 침해라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공정위가 김 의장에 대한 직권조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카카오를 둘러싼 여론의 싸늘한 시선과 정부·정치권의 강도 높은 규제 압박에 김 의장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카카오는 골목상권 침해 논란을 빚고 있는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으며, 5년간 3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해 상장한 BTS 소속사 하이브도 순위권

7위를 기록한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3조7296억원)의 지분 가치는 전년에 비해 크게 뛰었다. 10위권 내에 있는 상장사 오너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모두 하락한 가운데 조 회장만 55.56%나 상승했다. 지난해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이 각각 매출액 11조1326억원, 16조6049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덕분이다. 아울러 메리츠금융지주는 지주사 체제 전환 10년 만에 자산을 57조6100억원이나 불렸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4남인 조 회장은 한진가에서 유일하게 1조원대 지분 가치를 보유하면서 가문의 자존심을 세웠다. 반면, 한진가의 장손인 조원태 한진 회장(120위·2435억원)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121위·2416억원), 조현민 한진 부사장(123위·2407억원)이 보유한 한진칼 주식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순위가 올해 120위권대로 밀려났다.

BTS를 탄생시킨 방시혁 하이브(전 빅히트) 의장(10위·3조5443억원)은 처음으로 주식 부호에 이름을 올렸다. 하이브는 지난해 10월15일 증권가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상장했지만, 고평가 논란과 주요 주주의 대량 매도세가 이어지면서 34만원이었던 주가가 13만원대까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올해 1월부터 각종 호재가 터지면서, 주가가 20만원 후반대까지 상승한 상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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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울고 웃는 게임업계

이 밖에도 IT 콘텐츠 기업 오너들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방준혁 넷마블 의장(13위·2조5393억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14위·2조5235억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17위·1조5951억원)가 10위권에 안착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부터 넷마블과 엔씨소프트 같은 게임 기업은 언택트 시대와 맞물려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 특히 이들은 전통 재벌가로 분류되는 조현준 효성 회장(19위·1조3739억원)과 이재현 CJ그룹 회장(20위·1조3692억원)보다 상위권을 기록하면서 신흥 재벌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유행이 장기화하면서 이들 기업도 최근 역풍을 맡고 있다. 계속된 재택근무로 신작 게임 출시가 줄줄이 연기되면서, 실적 악화로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 때문에 넷마블과 엔씨소프트의 올 2분기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오너들의 지분 가치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방 의장과 김 대표의 지분 가치는 올해 각각 9.26%, 26.16%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유 주식 지분 가치가 가장 크게 증가한 상장사 오너는 박관호 위메이드 의장(30위·8897억원)이다. 전년 대비 무려 129.19%나 상승했다. 위메이드 주가는 최근 모바일 게임 ‘미르4’의 글로벌 성과에 힘입어 급등세를 보였고, 시가총액이 2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지난달 170여 개 지역에 출시된 미르4 글로벌 버전의 경우 서버 숫자가 초기 11개에서 최근 60여 개까지 늘어나며 흥행몰이를 이어가고 있다. 탄탄한 실적도 주가 상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매출이 559억원인 반면 올 상반기 매출은 145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보다 2.6배 매출이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영업손실을 기록했지만, 올 상반기 544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하면서 수익성도 개선됐다.

, 지분 가치가 가장 크게 하락한 상장사 오너는 LG가인 구본학 쿠쿠전자 대표(132위·2240억원)다. 구 대표가 보유하고 있는 쿠쿠홀딩스의 주식 평가액은 전년 대비 59.84%나 급감했다. 이 때문에 구 대표의 아버지인 구자신 쿠쿠홀딩스 회장(421위·695억원)과 동생 구본진 제니스 대표(334위·971억원)의 지분 가치도 함께 떨어졌다. 최근 쿠쿠홀딩스는 유통주식 확대와 거래 활성화 목적으로 액면분할을 단행했지만, 주가 부양은 신통치 않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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