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흥’으로 가득 찼던 영화 인생 행복했다”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3 13: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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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길을 묻다 (19)]
한국영화 탄생 100년 ‘거장’ 임권택 감독
“난 초창기에는 쓰레기를 만든 감독이었다”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⑯박관용 전 국회의장 ⑰송기인 신부 ⑱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⑲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우리 영화계를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거장이다. 한국영화 100년사에 있어 임 감독만큼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있을까. 임 감독의 작품세계는 동시대 다른 한국 감독들처럼 서구 영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가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뭔가 남들과 달라서다.

10여 년 동안 50여 편의 작품을 찍으면서 그의 가슴 한편에는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서구 영화의 문법으로 우리 정서를 과연 담아낼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1960년대엔 사극과 액션, 1970년대엔 사회계몽·전쟁영화 등을 만들던 임 감독의 작품세계는 197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 시사저널 이종현

《서편제》로 사상 첫 100만 관객 돌파

1981년 《만다라》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하더니 1986년에는 강수연을 세계적인 여배우로 만든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88년에는 《아다다》로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신혜수)를 받더니 이듬해 열린 낭트삼대륙영화제에서는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대형 회고전이 열렸다. 그해 모스크바영화제는 임 감독이 연출하고 강수연이 열연한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여우주연상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줬다. 

임 감독은 자신을 가리켜 ‘흥행과는 거리가 먼 재미없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예술’이라는 영역에만 머물렀던 건 아니다. 1990년 개봉된 《장군의 아들》은 67만 명이 극장을 찾도록 해 그해 관객동원 부문 1위에 올랐다. 1993년 작 《서편제》는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둬, 한국영화 사상 첫 100만 관객 돌파라는 이정표를 남겼다. 

임 감독과의 인터뷰를 기획한 이유는 단순했다. 100편하고도 두 편을 더 영화로 만들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거장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내가 뭘 조언해 줄 게 있다고…. 조용하게 사는 사람인데.” 기획의도를 설명하자 수화기 건너편 임 감독은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했다. 거듭된 요청에 임 감독은 5월10일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취재진을 초대했다. 장장 3시간 동안 임 감독은 반세기 영화 인생을 정리하듯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애정을 토해 냈다.

올해는 한국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째 되는 해다. 이렇게 뜻깊은 해에 해외에서 낭보가 들어왔다. 제72회 칸영화제는 5월25일(현지 시각) 봉준호 감독이 만든 《기생충》에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후배 감독이 이룬 쾌거를 임 감독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5월28일 전화인터뷰에서 임 감독은 “영화 《살인의 추억》 때부터 봉 감독을 눈여겨봤다”면서 “늦게나마 칸이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알도록 해 줬다는 점에서 봉 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며 누구보다 기뻐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올해 칸영화제에서 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상을 받아 다행이에요. 너무나 힘든 고비였거든요. 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탐으로써 우리 영화에 많은 힘을 보태줄 거 같아요. 그렇게 큰 상을 타게 되면 저절로 세계적으로 배급되거든요. 그만큼 세계인들이 우리 영화의 우수함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경사지요.”

봉 감독이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고(故) 김기영 감독 등 선배 감독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기영 감독이 당시 만든 작품은 정말 독특했어요. 그런 사실을 봉 감독이 세계 영화인들에게 알려줘서 다행이에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냥 묻혀 있었을 겁니다.”

평소 봉 감독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살인의 추억》 때부터 봤어요. 영화를 만들어가는 형식이나 영상이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때부터 ‘언젠가 좋은 상을 받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큰 상을 받게 되니,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네요.”  

요즘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나요.

“더러 학교(임 감독은 현재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 석좌교수로 있다)에 가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합니다. 며칠 전에도 했지요.”

후배 감독들이 만든 건 보시나요.

“제자들이 만든 건 더러 봐요.”

최근 보신 영화는 뭔가요.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봤어요. 내 취향은 아니더라고.”

한국영화를 보신 건 없으신가요.

“(동석한 부인을 바라보며) 그거 뭐지? 맞다, 《극한직업》 봤어요. (어땠냐는 질문에) 내용이 좋더라고요.”

세계 영화계에서는 감독님을 ‘한국적 정서를 영화에 잘 불어넣는 거장’이라고 합니다.

“저도 처음은 미국 영화를 얼치기로 베껴먹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1961년에 데뷔했는데(처녀작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다) 할리우드 싸구려 영화를 유사하게 만들었지요.”

1993년 10월30일 영화 《서편제》 관객 100만 명 돌파 기념행사가 서울 시네하우스에서 열린 가운데 임권택 감독(오른쪽 두 번째)과 제작진들이 축하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 연합뉴스

“초창기 작품, 할리우드 영화 베끼기 급급”

그래도 감독님 작품에는 서정적인 것들이 참 많습니다.

“처음에 영화를 시작해 1980년까지 50편을 찍었어요. 10여 년 동안 50편을 찍었다는 건 얼마나 많은 불량작품을 찍었다는 거겠어요. 그것도 마구잡이로 말이죠. 나이가 30~40에 접어들면서 ‘내 인생은 뭐인가, 아무것도 아닌 세월을 살았다’는 걸 자각했어요. 그래서 미국 영화 베껴먹는 것부터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적어도 내가 영화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아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고자 한 거고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한국적’의 의미는 뭔가요.

“그게 참 대답하기 어려운데, 내가 이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영향을 받았던 모든 정서들을 담아내는 거라고 봐야겠지요.”
 
2015년 《화장》을 마지막으로 거장의 ‘거침없는 질주’는 막을 내렸다. 이제 그에게는 102편의 필모그래피만이 남겨져 있다. 아쉬움은 여전하다. 그렇기에 대중은 여전히 거장에게 ‘커튼콜’을 외치지만, 그는 한사코 “감독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한다. 거장을 만나러 간 5월10일.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거장은 시사저널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며칠 전 운동하다 넘어졌다며 깁스를 한 손을 펼쳐 보이면서 너털웃음을 짓는 것이 영락없는 동네 할아버지 모습이다.

녹음이 내려다보이는 거실에서 편강을 주전부리 삼아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임 감독은 반세기 가까운 자신의 영화 인생을 거침없이 풀어나갔다. “내 초창기 영화는 쓰레기였기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었기에 내 영화 인생은 행복했다”는 거장의 말에 고개가 숙여졌다.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던 임 감독이 말하는 자신의 영화코드는 ‘흥’이다. 《취화선》이나 《서편제》나, 새드엔딩이든 해피엔딩이든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흥이다. 임 감독은 그걸 한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예전 작품들 가끔 보세요.

“안 봐요. 짜증 나서…. 앞으로도 안 볼 거예요. 간직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건 쓰레기예요. 철들어서 영화 만들어 다행이지.”

수많은 작품을 찍으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은 뭔가요.

“나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게 없기에 (대표작) 그런 건 없어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든 적이 없지요. 아직도요. 옛날 작품 보면 결함만 보이죠. 내 작품을 내가 잘 안 보는 이유가 가다가 그런 것(결함)과 만나면 미칠 거 같아요. 완벽하지 못한 부족함, 양에 차지 않는 부족한 것들이 나를 괴롭히지요. 그래서 안 봐요.”

모든 작품에 들어가 있는 메시지는 결국 ‘한국’인 건가요.

“처음부터 한국을 알리려 찍은 영화는 없어요. 그냥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아! 저런 소재를 영화로 담고 싶다’는 ‘흥’, 그냥 흥에 겨워서 찍는 거예요. 흥을 영화에 담고 싶은 그런 욕구 때문이라고 봐야죠.”

감독님의 영화세계를 한마디로 말하면 ‘흥’이군요.

“그렇지요. 흥이에요. ‘흥이 넘친다’는 건 어차피 자기 기(氣)를 돋우려는 그런 거니까.”

기업으로 치면 감독도 CEO(최고경영자)인데, 현장에서 배우들을 어떻게 통솔했나요.

“지가(자기가) 바로 살면 절로 따라와져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바라서는 안 되는 거지요.”

2006년 11월15일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100번째 영화를 촬영 중인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포구 세트장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왼쪽)과 함께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인으로 살아가며 영향 받은 모든 게 소재

왜 세계인들이 한국영화를 좋아할까요.

“지금 우리 영화들이 옛날에 비하면 세련됐잖아요. 재미도 있고. 그런 거 보면 한국 사람들의 영화적 재능이 유별난 거 같아요. 먹고살기 편해 사회적으로 큰 문젯거리가 없는 선진국들은 영화도 재미가 없거든요.”

후배 감독들에게 덕담을 하신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다만 감독 나름의 소신이나 창의성 같은 것들이 있을 테니, 그런 것들이 잘 살아나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다양성을 찾았으면 해요. 요즘 보면 돈 많이 들어간 영화들은 뭔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다면 해 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딱 한 작품을 다시 찍고 싶은데, 바로 《짝코》(1980년작)예요. 모든 것이 너무 미흡해서, 다시 한번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요. 하지만 별로 가망이 없는 희망이에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요(웃음).”

10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드셨네요.

“미친 놈이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영화가 좋아서 미쳐야 가능한 거예요. 결국 좋은 영화 한 편 찍지 못하는 짓을 했으니….”

후대 영화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으시겠어요.

“내 영화가 있으니까, 뭘 어떻게 기억해 달라는 건 말짱 헛소리예요. 초창기 불건강(건전하지 못한)한 영화가 지금도 버젓이 영상자료원에 남아 있으니, 그게 미치는 거지.”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혼란스럽고, 너무 추접스러워요.”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덕담을 해 주십시오.

“맑은 세상을 만들려면 젊은 사람들이 맑아져야죠. 요즘 뉴스에 나오는 추접스러운 스타들을 보면…. 에이, 그 사람들부터 맑아야 해요.”

영화 인생에서 기억나는 배우가 있다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

“하도 많은 영화를 했기에 여기서 누구를 칭찬할 수가 없어요. 나쁜 영화도 만들었고 철든 영화도 해 봤지요. 평생 영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게 행복합니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를 떠나 그렇게 좋아하면서 영화와 같이 살 수밖에 없었기에 말이죠. 그런 인생을 산 게 너무 행복해요.”
 
임 감독은 반공영화도 많이 찍었다.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임 감독이 장르영화와 작별을 고한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유신정권부터다. 군사정부는 창작의 자유마저 막았다. 그사이 충무로는 활기를 잃어갔다. 임 감독은 “해외 유명 영화제에 참석해 평론가들로부터 듣는 질문이라곤 검열 이야기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시나리오는 물론, 완성되면 또 다시 한번 더 검열을 받아야 했다. 수많은 영화사가 통폐합됐다. 급기야 1973년 유신정권은 영화진흥공사를 세워 모든 영화를 국가 감시 아래 뒀다.

거장은 변신을 시도해야 했다. 어쩌면 이는 예술인의 작은 몸짓일지 모른다. 1978년작 《족보》는 임권택이라는 연출자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이다. 표지에서 임 감독은 당당하게 외친다. ‘이것이 한국판 뿌리입니다.’ 일본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치(梶山季之)의 원작을 영화화한 《족보》는 가혹한 식민치하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한국인의 의지를 잔잔하게 풀어냈다. 《족보》에서 시작한 임 감독의 변신은 《만다라》에서 본격화된다. 《춘향뎐》(2000년작)이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될 수 있었던 것도 치열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한다.

드디어 임 감독은 《취화선》(2002년작)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1955년 먹고살기 위해 정창화 감독 연출부 ‘똘마니(막내)’ 역할을 시작한 이래 딱 47년 만의 일이며 메가폰을 잡은 이래 98번째 작품만에 거둔 성과다. 임 감독은 “세련되지는 못했어도 진솔한 인간의 이야기에 한국적 정서를 불어넣어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도록 영화를 만들었기에 평단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5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오른쪽 두 번째)이 2002년 5월28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환영객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영화 《서편제》는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특히 극찬한 작품입니다.

“DJ와 무슨 인연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언젠가 측근들이 선거운동을 할 때 DJ가 일본에서 납치된 것을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누구 죽일 일 있나….”

판소리를 소재로 어떻게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셨나요.

“난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처음부터 히트했어요. 하루는 전라도 광주에 가서 지방 흥행업자를 만나는데 기생집에서 술을 마셨지요. 거기서 판소리, 아쟁, 거문고 소리를 술 마시며 들었는데…. 공옥진씨 알아요? 그 양반도 거기 와서 춤추고 그랬어요. 알 만한 명창들이 거기에 있었지요. 그때 ‘이런 판소리를 영화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요. 한 해 영화를 5~6편씩 찍어댈 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 했지요. 그 뒤 1978년인가, 소설가 이청준 선생 글이 잡지에 실렸는데 그때 그걸 보면서 ‘언젠가 영화로 한번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요. 그러다 정부가 《태백산맥》을 못 찍게 하니, 그러면 노느니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서편제》였어요.”

2019년 5월10일 임권택 감독이 명품 에르메스가 임 감독을 위해 제작해 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앉아 사진포즈를 취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정부가 《태백산맥》 제작 막자 《서편제》 기획

저예산 영화였다면서요.

“(돈이) 아주 안 들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오정해가 돈이 들어갔겠어요, 김명곤씨가 들어갔겠어요. 미리 어디가 촬영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스태프들 데리고 다니면서 찍은 영화가 그렇게 흥행이 될 줄 몰랐지요.”

무대인 청산도는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하네요.

“다 그런 게 운인 거지…. 손아래 동서가 전남 완도 부근에 청산도라고 있는데 거기 한번 가보라고 해서 기대도 안 하고 가봤더니 쓸 만한 곳이 몇 군데 있었어요. 《서편제》에 나온 그 유명한 5분40초짜리 롱테이크 말이에요. 우리도 찍으면서 그렇게 유명한 커트가 될 줄은 몰랐지. 그런 흥이야 전라도 사람이면 있는 거니까.”

《장군의 아들》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요.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영화사를 차렸는데, 초창기부터 이 사장은 나한테 1960년대 저질 액션영화를 찍게 하고 싶었나 봐요. 처음 만나 김지미씨가 주연인 《비구니》를 찍으려다 못 했고, 그다음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강수연양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지요. 그런 다음에야 이걸(영화 《장군의 아들》 대본) 내놓는 거예요. 그때 나는 저질 영화 감독이 아니고 꽤 유명한 감독이었거든요. 처음에 서너 번 거절하다 나중에 수락했지요. 생각해 보니까 나도 어쩌면 그런 불량스러운 영화를 찍고 싶은 본능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흥행했지요. 그때 이태원 사장을 다시 봤어요. 제작자란 모름지기 자기가 뜻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지요.”

주연들을 신인들로 구성했는데,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쉽지 않은 결정이지 않았나요.

“신인에게 능숙한 연기력을 뽑아내려면 내가 개입하지 말아야 해요. 액션영화면 액션이 더 두드러지게 해야 하지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은 기다리다 보면 서서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평론가들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바람 불면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는 갈대와 같다고 말한다. 위험 수위에서 좌우를 오가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더 매력이 있다. 정작 임 감독 본인은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라고 치부했지만, 체계가 없었던 것은 비단 그의 영화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랬다. 세계 트렌드를 쫓아가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베껴야 했다. 요즘 말로 치면 ‘패스트 팔로워’라고 할까.

우리가 그에게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본인 스스로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고, 그 해답을 우리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잘 아는 쪽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 경영인 이나모리 가즈오(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은 평소 “경영자의 인격이 높아짐에 따라 기업은 성장하고 발전한다. 경영자의 인간성, 말하자면 사람으로서의 그릇 크기만큼 기업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임 감독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오롯이 빛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임권택이 말하는 ‘크게 되는 배우’의 비결

임권택 감독의 작품은 우리 영화계의 화수분과 같은 역할을 했다. 박상민·신현준·오정해·조승우 등 ‘초짜 배우’들은 하나같이 임 감독의 눈에 들어 데뷔했다. 그는 신인들의 잠재력을 어떻게 찾을까. 혹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지 않을까. 그는 “《장군의 아들》 같은 경우는 1572명이 응모했는데 나야말로 정말 연기자로 크게 잘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못 알아봤다”면서 “황정민·차인표 등이 《장군의 아들》에 응모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아쉬워했다.

임 감독이 생각하는 될성부른 나무는 ‘느낌’이 다르다. 그는 “본인들하고 이야기해 보면 감수성, 순발력이 빠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신인한테는 본인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서 드러나는 연기여야지, 안에서부터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안 돼요. 내 역할은 그런 본인의 역할을 좀 잘 이해하게끔 하는 정도예요.

판소리 소재 영화 《서편제》 탄생 비화

임권택 감독이 오늘날 세계적인 거장이 되기까지는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감독 인생을 정일성·이석기 촬영감독,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의 공로로 돌렸다.

특히 ‘제작자 이태원’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대표작인 《장군의 아들》은 수년간 이 대표가 밀어붙인 결과다. 《서편제》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임권택-이태원’ 두 콤비의 오랜 케미가 빛을 발해 가능했다. 임 감독은 “이태원 사장이 《장군의 아들》로 돈을 벌어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자고 해 탄생한 게 《서편제》”라고 비화를 털어놓았다.

“소설 《태백산맥》을 영화로 만들려고 했는데,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것 자체를 반대했어요. 이태원 사장이 ‘1년만 쉬자’고 해서 스태프들과 지방에 놀러 다녔는데, 그때 찍은 게 《서편제》예요.”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지금이나 그때나 상당한 모험이 뒤따른다. 아무리 저예산 영화라도 잘나가던 거장의 이력에 흠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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