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촘촘히 줄 세우지 말자던 이른바 ‘진보’는 킬러 문제가 필요한 듯 주장하고, 변별을 통한 교육의 수월성과 자유 경쟁의 원리를 그토록 강조하던 이른바 ‘보수’는 어느새 사교육 분쇄에 목숨이라도 건 듯 행동한다.”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이 경향신문 7월3일자 칼럼에서 한 말이다. 좋은 지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미쳤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짜증을 내면서 한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평소 지론인 ‘보수·진보 구분 무용론’을 입증해 주는 사례인지라 즐거운 마음으로 한 생각이다. 이념? 그런 건 없다. 오직 나와 우리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최근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제3지대 신당’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관련 기사들을 열심히 읽다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민주당=진보, 국민의힘=보수’라는 전제하에 신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따져묻는 논의가 적잖이 나오는 게 아닌가. 기존 거대 양당을 돕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면, 그런 어법은 지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정치적 무당파들에게 물어보라. 이념적 정체성과 관련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정당이 너무 ‘극우’라거나 너무 ‘극좌’라서 화가 치민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게 아니다. 그들이 화를 내는 건 좌우를 막론하고 “인간들이 너무 돼먹지 않았다”는 원초적인 것이다. 그간 제기된 몇 가지 주요 불만을 살펴보자.
첫째, 양심이 없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한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하고 여러 차례 거짓말이 들통난 정치인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오히려 우대할 정도로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
둘째,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이 없다. 그들이 밥 먹듯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내로남불을 보라. 남이 할 땐 비난하던 짓을 자신이 할 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즉 정치권에서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결정적인 이유다.
셋째, 책임이라는 단어나 개념을 모른다. 그들은 ‘오늘’만 알고 ‘내일’을 모르는 포퓰리스트다. 자신들의 돈은 구두쇠처럼 아끼면서도 국민 세금은 펑펑 써 젖히면서 유권자들의 표를 매수하는 정치로 국가의 미래를 좀먹고 있다.
넷째, 공존이나 타협이라는 단어나 개념을 모른다. 승자독식 노름판에서 정치를 배운 탓인지 상대편을 배제하거나 죽이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을 거부하면서 상대를 물어뜯으려고만 하는 ‘좀비 팬덤’을 키우는 데만 혈안이 돼있다.
다섯째, 증오와 혐오를 선동해 정치를 전쟁으로 만든다. 대중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선동 능력과 적(敵)을 섬멸할 수 있는 기술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능력이다. 국가와 민족? 그건 ‘정치의 전쟁화’를 위한 수사적 양념일 뿐, 중요한 건 같은 패거리의 안녕과 풍요다.
‘제3지대 신당’의 성공 비결은 간단하다. 위에서 지적한 다섯 가지 불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답은 의지를 드러내는 수준의 것일 뿐이기에 ‘신뢰’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신뢰는 시간을 먹고 산다. 장기간에 걸친 평소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번엔 믿지 않아도 좋다. 다음번 선거 때까지 우리의 행태를 보고 믿을 수 있다면, 그때 지지를 해줘도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제3지대 신당’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조직에 중도 정당이란 가짜 간판을 달고 대국민 사기를 치는 것임. 가짜 중도는 늘 그렇게 생겨남. 중도를 갈데없는 노숙자들 받아주는 쉼터로 착각한 루저들의 집합소임.
가짜 중도는 무조건 실패함. 쉰내가 진동하거든. 준만이처럼 정치판에서 수십년씩 굴러쳐먹어 볼짱 다본 늙다리들만 얼씬거림. 이런 늙다리들에게 중도는 재벌들이 구치소에서 꺼내달라며 입는 환자복과 같음. 그냥 인생에 한두번 입었다 벗는 패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