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페이도 부럽다”…‘No페이’에 멍드는 패션업계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8.11.26 09:33
  • 호수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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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 0원’ 책정하는 에이전시·디자이너에 모델만 한숨…“정부 실태조사 필요해”

패션업계에선 ‘열정 페이’도 배부른 소리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유수의 패션업체들이 자사 쇼에 서는 신인 모델들에게 임금을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서다. 신진 디자이너부터 매스미디어에서 이름을 알린 유명 디자이너까지, 모델에게 수당을 주지 않는 대신 신발이나 옷 등으로 임금을 대체하는 ‘노(No) 페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델들이 ‘최저임금 준수’를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유명 디자이너는 “열정 페이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예쁜 단어가 될 수 있다”며 “그(무명) 모델들에게 임금을 줄 바에 쇼를 안 하고 만다”는 망언을 일삼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이상봉 디자이너실의 저임금 논란 이후에도 패션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한 뼘도 나아지지 않은 셈이다.  

 

ⓒ 일러스트 신춘성


‘2019 봄·여름(S/S) 패션위크 P 디자이너 쇼 오디션. 노 페이. 착장 의상 제공.’

1년 전 모델로 처음 런웨이에 오른 김피준씨(가명). 그는 이 같은 문자를 소속된 에이전시 혹은 아는 선배 모델들에게서 수시로 받는다고 했다. 임금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아직 이름을 알리지 않은 모델은 돈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업계의 ‘불문율’이라고 했다. 오디션을 거쳐 겨우 쇼에 오르더라도, 남는 것은 디자이너가 준 옷 한 벌. 이마저도 안 주는 일이 허다하다. 교통비와 월세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일을 하며 얻는 수입은 ‘마이너스’. 편의점에서 알바(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보다 월급여가 적다.

김씨는 “유명 디자이너 쇼에 오르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그 경쟁을 뚫더라도 갑자기 돈을 버는 구조도 아니다”며 “동생이 편의점 시급이 너무 적다고 투덜대기에 ‘너는 최저임금이라도 받지, 나는 월급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웃픈(웃기고도 슬픈) 현실인데, 선배들도 같은 생활을 거쳤다고 하더라. 이런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모델의 숙명인 건지…”라며 말을 줄였다.

패션업계의 부당한 처우가 입방아에 오른 게 비단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앞서 패션업계의 저임금 문제가 공론화된 건 지난 2014년이다. 패션계의 대부로 불리던 이상봉 디자이너가 자사 직원들에게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급여를 준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상봉 디자인실의 급여는 견습 10만원, 인턴 30만원, 정직원 110만원. 야근수당을 포함한 급여였다.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옷을 만들던 이 디자이너였기에 공분을 불렀다. 이후 이 디자이너는 “패션업계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점들을 듣겠다”라고 사과하며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4년이 흐른 지금, 패션업계의 실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화려한 런웨이 뒤에는 패션업계 ‘초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이 감춰져 있었다. 여전히 인턴으로 재직하는 수많은 견습생들이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임금을 받고 있으며, 특히 패션계의 ‘꽃’으로 불리는 모델들의 경우 임금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아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1월7일 청년유니온과 패션노조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14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패션노조는 공개댓글 투표를 통해 이상봉 디자이너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 연합뉴스


‘이상봉 열정 페이’ 논란 後…달라진 게 없다

지난해까지 국내 유명 모델 에이전시에서 근무했던 김미령씨(가명)는 “신인 모델들의 ‘노 페이’는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모를 정도로 뿌리 깊게 형성된 문화”라며 “보통 쇼 전에 착장과 사전 리허설을 거치고 쇼 당일에는 하루 종일 스탠바이(대기)해야 하지만, 이걸 시급으로 계산해서 준다는 디자이너는 손에 꼽힌다. 운이 좋으면 옷 한 벌 얻어가는 것이고 아니면 무일푼으로 집에 가는 경우도 잦다”고 귀띔했다.

과연 디자이너들은 어떤 사유로, 어떤 생각으로 모델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것일까. 인터뷰에 응한 디자이너들은 공통적으로 ‘모델 에이전시’와 ‘무한경쟁’을 입에 올렸다. 말인즉슨 쇼에 올라갈 모델은 적은데 해당 쇼에 올라가고픈 모델은 많다. 이 상황에서 모델 에이전시들이 소속된 모델을 일단 띄우고 보자는 심리로, 디자이너들에게 먼저 ‘공짜 모델’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쇼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고픈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이 같은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올해 가을·겨울(F/W) 패션쇼에서 이름을 알린 신진 디자이너 L씨 역시 자신의 쇼에 오른 모델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L씨는 “에이전시에서 먼저 자기네 모델을 좀 세워달라며 프로필을 보낸다. 페이를 안 줘도 된다고 하니까 오디션 안 보고 그냥 세우기도 한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세워 드리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원래 지인이나 아는 동생들만 쇼에 올리는데, 얘들도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물론 고마우니까 옷을 주는데, 따지고 보면 이게 더 모델들에게 이익이다. 내 옷 한 벌이 100만원을 넘는데, 지들(모델)이 원래 시급대로 계산해 봐야 20만~30만원 정도 받아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최근 지상파·케이블 예능 프로그램과 유튜브 등에서 가장 뜨거운 디자이너로 각광받고 있는 P씨도 ‘노 페이’로 쇼를 진행한 디자이너로 지목됐다. P씨는 시사저널과의 전화인터뷰 내내 “열정 페이가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열정 페이란 게 못난 단어가 될 수 있지만 어떤 입장인지에 따라 예쁜 단어가 될 수도 있다. 그 나이에는 (돈을 받지 않더라도) 한 번 노출되면 더 큰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라며 “사실 모델 에이전시에서는 상위 5%의 모델만 키우지, 나머지는 스폰서 역할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필드에 발을 담그는 게 중요한데 너무 쉽게 기회를 주면 쉽게 포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저시급에 준하는 임금을 주면 경영에 문제라도 되는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는 “아무래도 세이브(save)가 된다. 그럼 무대도 마련하고 옷도 더 만들 수 있다. 일하고 싶은 애들은 넘쳐나는데 굳이 돈을 많이 쓸 이유가 없다”며 “모든 조건이 완벽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쇼에 데뷔하면 모델과 디자이너는 ‘윈윈(win-win)’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만약 이게 불만이라면 내년부터는 (쇼를) 안 하겠다. 좋은 뜻으로 한 일들인데, 내가 지금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는 것 같다”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앞서 취재 과정에서 만난 모델들이 입을 모아 말한 ‘돈을 주지 않는 디자이너실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 디자이너의 심기를 건드리면 기회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이었다. 



시민단체 “정부 의지 가지고 조사 나서야”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노동의 대가가 ‘0원’으로 책정되는 모델들. 이를 방관하는 것을 넘어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델 에이전시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디자이너들. 과연 이 엉킨 실타래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우선 법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갈린다. 모델과 에이전시 간의 구체적인 계약 내용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어서다. 법무법인 바른의 최재웅 변호사는 “에이전시 계약 내용부터 살펴봐야 한다. 만약 (페이와 관련해) 상호 간의 계약이 있다면 형법상 강요죄는 어려울 것”이라며 “다만 에이전시가 모델에게 지휘·감독권 등을 행사한 정황이 있고 무임금까지 강요했다면 사실상 근로자임을 주장하거나 계약 내용이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단체에서는 패션계의 박한 처우 문제는 사회의 적폐(積弊)니만큼, 정부가 적극적인 실태조사부터 벌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구교현 알바노조 1기 위원장은 “모델뿐 아니라 패션사들이 처한 현실이 실제 어떤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실태조사를 진행해 결과를 내놔야 한다”며 “이후 그 결과를 토대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등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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