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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선복 경쟁에서 점점 더 밀려…매각 지연은 더 큰 리스크

이스라엘과 하마스 세력의 갈등으로 촉발된 가자전쟁이 휴전 국면에 접어들면서 막혀 있던 홍해~수에즈 항로가 다시 열릴 것으로 보인다. 곧바로 글로벌 해상운임이 빠르게 식고 있다. 공급 과잉이 누적된 상황에서 희망봉 우회로 발생했던 ‘톤마일 효과’마저 사라지면, 운임 하락 압력은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 산업계는 물류비 부담 완화를 반기고 있지만, 운임이 꺾이면 실적이 바로 흔들리는 해운사 HMM에 이번 휴전은 실적을 끌어내리는 ‘직격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인 ‘HMM 알제시라스(HMM Algeciras)호 ⓒPPA 연합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인 ‘HMM 알제시라스(HMM Algeciras)호 ⓒPPA 연합

수에즈운하 정상화…‘톤마일 효과’ 사라진다

HMM은 올 3분기 매출 2조7064억원, 영업이익 298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3.8% 줄어들고, 영업이익은 79.7% 감소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조4614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분기 기준 역대 세 번째 실적을 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이다.

올해 실적을 흔든 첫 번째 변수는 바로 관세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각국에 고율 관세를 잇따라 발표하자 글로벌 화주들은 “언제든 관세가 붙을 수 있다”며 유럽·미주 물량을 앞당겨 선적했다. 조기 선적 효과로 운송 물량이 급증하며 당시 HMM의 실적을 비정상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올 3분기에는 정반대 상황이 전개됐다. 관세가 본격적으로 현실화되면서 화주들의 재고 전략이 급변했다. HMM의 유럽·미주 물량은 큰 폭으로 빠졌다. HMM에 따르면, 미 서안·동안 운임은 각각 전년 대비 69%, 63% 하락했다. 지난해 ‘유령 성수기’ 효과가 사라지자 관세 충격이 고스란히 실적에 반영된 셈이다. 분기 영업이익률이 11%로 글로벌 선사 대비 선방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지만, 운임 구조 자체가 꺾인 이상 4분기 실적 방어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관세로 인한 조기 선적 효과가 사라지면서 물동량이 급격히 꺾인 가운데 업계가 다음 위험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수에즈운하 정상화다. 전쟁 이전 수에즈운하는 유럽 수출의 핵심 통로였다. 글로벌 물동량의 약 12%, 컨테이너 교역 기준으로는 25~30%가 이 항로를 통과한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LNG·원유 물량도 상당 부분 이 구간에 의존했다. 그러나 후티 반군 공격 이후 선사들은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했고, 항해일은 최대 2주 늘어났다. 이 연장 구간이 ‘톤마일 효과’를 만들어냈다. 톤마일 효과란 해운 분야에서 선박의 운송 거리(톤마일)에 따라 운임 등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공급을 억제해 운임을 떠받친 결정적 요인이 됐다. 같은 선복이라도 항해가 길어지면 시장에 공급되는 운송능력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전이 현실화되면 상황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업계는 수에즈운하가 정상화될 경우 글로벌 컨테이너 톤마일이 약 11% 감소할 것으로 본다. 같은 선박으로 더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르게 되면서 공급이 늘어나는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류 업계 한 인사는 “희망봉 우회로 묶여있던 200만TEU 상당의 선복이 한꺼번에 풀리면 운임 하락 속도는 지금보다 더 가팔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컨테이너선 공급 확대는 이미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 선박 중개업체 브레마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현재 1040척, 총 1090만TEU 규모의 컨테이너선이 건조·발주 중이다. 전 세계 컨테이너 선복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팬데믹 때 비정상적으로 뛴 해상운임이 글로벌 선사들의 ‘묻지마 발주’를 부추겼고, 그때 찍어놓은 대규모 신조선 물량이 이제야 시장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다. 여기에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세 부과가 연기되면서 노후 선박 폐선 압력도 낮아졌다. 그동안 공급 조절용으로 써온 감속 운항, 임시 결항, 정기 수리 연장 등의 수단도 수에즈항로가 정상화되면 효과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향후 5년간 컨테이너 시장은 공급 과잉, 수요 둔화, 무역 분쟁이 겹쳐 구조적 침체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시장에서는 “해운사의 운임 방어 논리가 거의 사라졌다”는 말까지 나온다. 컨테이너 업황은 수요보다 선복 증가 속도가 조금만 빨라도 곧바로 운임이 무너지는 구조인데, 지금은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 발주가 쏟아지며 공급이 폭증하는 ‘특수한 침체기’이기 때문이다. TOP5 글로벌 선사의 오더북만 합쳐도 HMM 전체 선복량의 10배가 넘는다. 이제 남은 카드는 사실상 요율 인상(GRI) 정도인데, 출혈경쟁이 이어지는 국면에서는 GRI가 시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우조선해양 전철 밟을 수도”

HMM의 체질 개선 지연과 매각 일정의 불확실성도 리스크를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글로벌 톱티어 선사들이 해운·항만·철도·항공·포워딩으로 밸류체인을 넓히는 동안, HMM은 사실상 단일 업종 구조에 가까운 상태다. 수익성 변동 폭이 큰 컨테이너 업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는 시황이 꺾일 때 실적 변동성이 더욱 확대되는 약점으로 이어진다.

구교훈 한국국제물류사협회 회장은 “팬데믹과 홍해 사태 등 일종의 ‘이벤트 기반’ 특수 덕에 HMM이 반짝 실적을 냈던 것일 뿐”이라며 “정상 시황에서는 글로벌 선사와 정면으로 경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MSC·머스크·CMA-CGM 등은 항공·터미널·철도·계약물류로 포트폴리오를 넓히며 해운운임 사이클에 대한 민감도를 낮추고 있지만, HMM은 2030 중장기 계획도 제때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각 지연은 더 큰 문제다. HMM은 원래 민간기업이지만, 한진해운 파산 이후 산업은행·해양진흥공사가 대주주로 남아있다. 시황 하락기와 매각 지연이 겹치면 ‘대우조선해양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업계에서 나온다. 당시 정부는 수년간 구조조정과 공적자금 투입을 반복하다 결국 조 단위 손실을 보고 한화에 매각했다.

HMM 주가는 지난 9월 자사주 소각 이후 계단식 하락세를 보이며 현재 시가총액은 17조원대까지 떨어졌다. 시황이 더 악화될 경우 매각 가격 협상력은 더욱 떨어지고 ‘헐값 매각’ 논란까지 불거질 수 있다. 한 해운 업계 관계자는 “매각이 늦어질수록 기업 가치가 시황에 끌려 내려간다”며 “투자 여력, 시장 대응 속도를 고려하면 HMM은 민간 대기업 체제로 전환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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