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금융당국 위에 ‘나는’ 보이스피싱
  • 이용우 시사저널e. 기자 (ywl@sisajournal-e.com)
  • 승인 2019.01.10 08:00
  • 호수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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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피해액 전년 대비 83.9% 증가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금융당국 ‘멘붕’

“잡힐 듯 안 잡힌다.” 

보이스피싱이 금융권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나 금융당국, 금융사들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자가 만난 금융사 직원들이 “눈앞에서 발생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범죄”라고 보이스피싱 범죄를 표현할 정도다.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과 관련한 금융사 직원 교육이나 통장 발급 기준을 강화해도, 고객이 직접 범죄자 계좌로 돈을 이체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근절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현재도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범죄 수법이 갈수록 진화하면서 피해 규모 역시 덩달아 증가하는 추세다. 금융당국과 은행들은 올해도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한 홍보 활동이나 인공지능 기술 도입 등을 통해 ‘보이스피싱 범죄와의 전쟁’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범죄 진화 속도가 더 빠른 만큼,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이 당국 위에서 날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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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 대책 비웃는 보이스피싱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8년 1~10월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3340억원이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83.9% 증가해 또다시 사상 최대치를 돌파했다. 같은 기간 보이스피싱 등에 사용된 대포통장 발생 건수도 4만7520건으로, 35.2% 늘었다. 금감원과 금융권은 보이스피싱 피해가 크게 증가한 원인으로 갈수록 진화하는 수법을 꼽았다. 검찰이나 금감원 직원을 사칭하는 고전적인 수법 외에, 20대 여성이나 40~50대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사기 수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검찰 홈페이지를 만들어 ‘나의 사건 조회’ 기능까지 복제하고 있는 만큼 일반인들이 진짜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2018년 상반기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 사건의 24%가 20~30대에서 발생했다. 노년층(19.8%)보다 심각했다. 특히 20~30대 여성 피해액이 전체의 15.7%로 같은 연령대 남성(8.3%) 피해액의 두 배를 기록했다. 피해 유형별로 보면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서민들에게 저금리 대출로 유혹해 피해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명 ‘대출 사기형’ 보이스피싱이다.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수요 증가와 금리 인상기를 틈타 저금리로 대출해 주겠다고 접근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 중 81.4%(2만5257건)가 이 대출 사기형으로 분석됐다. 큰돈이 필요한 40~50대에서도 대출 사기형 보이스피싱 피해(1만6283명, 전체의 64.4%)가 많이 나타났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메신저에 접속해 지인으로 속이고 금전을 편취하는 ‘메신저피싱’ 방식도 새로 등장했다. 이 외에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이 먼저 전화를 걸지 않고 피해자의 전화를 기다리는 신종 사기 수법도 있다. 이 경우 범죄자가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해 피해자 휴대전화에 악성 앱을 설치한다. 이후 피해자가 금융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면 이 전화를 중간에서 가로채 실제 은행 콜센터인 것처럼 속여 금융사기를 유도한다. 금융보안원은 “범죄자가 대출상담을 유도하는 특성 때문에 사칭되는 금융사 80% 이상이 인지도 높은 대형 은행들이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쉽게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맞춰 정부나 금융당국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모든 국민에게 연 3차례 이상 보이스피싱 경고 문자를 보내고 공익광고와 가두·창구 캠페인을 실시하는 등 대국민 홍보를 실시하기로 했다. 보이스피싱 관련 예방 대책도 강화할 예정이다. 우선 범죄에 사용된 전화번호의 이용중지 기간을 기존 90일에서 1〜3년으로 늘릴 계획이다. 명의도용 등 휴대전화 부정사용 방지를 위해 휴대전화 가입자에 대한 본인 확인 전수조사도 실시하기로 했다. 보이스피싱에 이용되는 대포통장을 제재하기 위해 인터넷전문은행에서 비대면 계좌를 개설할 때 고객 확인 절차도 강화할 예정이다. 

금감원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할 계획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SK텔레콤과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에 활용될 인공지능(AI) 기술 개발 관련 업무협약을 맺었다. 금감원은 기술 고도화를 위해 SK텔레콤에 사기범 음성 데이터를 제공하기로 했다. 올해 초 관련 기술 개발을 마무리하고 상반기 안으로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시간이 갈수록 진화하면서 피해 규모 또한 커지고 있다. ⓒ 연합뉴스
보이스피싱 범죄가 시간이 갈수록 진화하면서 피해 규모 또한 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사칭 전화 오면 해당 기관에 확인부터 해야”

하지만 이런 대책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많다. 한 은행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으로 은행 지점에선 통장 개설이 복잡해졌고 증빙서류 요청도 까다로워져 시민들의 불편이 늘고 있다”며 “보이스피싱 소비자 피해가 직접적인 피해 외에 간접적인 피해로도 확산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범죄자들은 여러 대책들 위에 신종 수법을 만들어 피해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대책에 앞서 고객 스스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당국의 한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개인 휴대전화로 사기를 벌이기 때문에 고객이 검찰, 금감원, 경찰을 사칭하는 전화에 우선 당황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일단 전화를 끊고 해당 기관에 확인 전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객의 주의가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2018년 금감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 젊은 층이 보이스피싱 범죄수법·처벌 등에 대해 대체로 잘 알고 있지만 정부기관에서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 준다’는 등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35.2%나 됐다. ‘금융회사는 대출처리 비용 등을 이유로 선입금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20~30대 젊은 층은 15%에 불과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들이 나오고 있지만 범죄를 모두 예방할 수는 없다”며 “‘나도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부 사칭형 등 주요 범죄수법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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