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애환 달래준 한국 가요계 ‘큰 별’
‘가황(歌皇)’ 나훈아가 58년 가요 인생을 마무리하고 은퇴했다. 한국 전통가요를 상징하는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팝음악 스타일이 일세를 풍미했다. 1960년대에 가수 이미자가 트로트를 부흥시켰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수 남진, 나훈아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트로트 전성기를 이끌었다. 상대적으로 남진보단 나훈아가 조금 더 전통적 정서와 서민의 정서에 밀착한 측면이 있다.
창작자·배우…대중문화에서 종횡무진 활약
나훈아의 고향 노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고향을 떠난 많은 이가 도시 빈민이 돼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낯선 도시 생활이 힘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생계에 치여 선뜻 고향을 찾지도 못했다. 그런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준 것이 바로 나훈아표 고향 노래들인 것이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이라는 가사의 《고향역》이나 ‘머나먼 남쪽 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라는 가사의 《머나먼 고향》 같은 곡들이 그랬다. 당시 힘든 노동을 마치고 ‘한잔 술에 설움을 타서 마시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한국인의 곁에 나훈아가 있었다. 그의 노래에 이런 성격이 있기 때문에 명절 특집쇼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나훈아는 한국적 트로트의 ‘꺾기’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부르는 민요를 들으며 자란 나훈아는 국악의 창법을 가요에 반영했다. 그 결과 기존의 국악적 꺾기가 더욱 강화되며 일본 대중음악 장르 중 하나인 ‘엔카’와는 다른 트로트의 한국적 정체성이 더 뚜렷해졌다. 그의 창법이 많은 후배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대중의 사랑도 크게 받아 성대모사의 단골 대상이 되기도 했다.
창작자로서도 놀라운 발자취를 남겼다. 노래방 반주기에 가장 많은 노래가 수록된 가수가 바로 나훈아라고 한다. 그가 취입한 노래만 3000여 곡에 달하는데 앨범으론 200여 장이다. 자작곡은 800곡 이상이라고 알려졌다. 국민 히트곡도 많다. 당대의 스타였던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에도 《여자이니까》 《사랑》 《청춘을 돌려다오》 《땡벌》 《무시로》 등 대형 히트곡들을 배출했다. 2010년대에도 《남자의 인생》 《테스형》과 같은 신곡을 히트시켰다.
나훈아의 완벽주의는 유명하다. 그는 과거 “프로는 돈값을 해야 한다”며 “늘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킴은 물론 어디에 허투루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언제나 창작과 공연에 천착했다. 그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유배 보낸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별(스타)은 별이어야 합니다. 별은 구름이 조금만 끼어도 안 보여야 합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별은 별이 아닙니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스스로 빛나야 합니다”라는 말도 유명하다. 자신이 항상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도록 엄격하게 자기관리를 해왔다는 방증이다.
공연에 대한 자부심은 어떨까. 대표적인 공연 장인으로 언제나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여 왔다. 이와 관련해 삼성가의 연회 초청도 거절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나훈아는 “난 대중예술가라서 개인이 아닌 공연 티켓을 산 관객 앞에서만 노래한다”고 했다.
“국민가수였다는 사실 변하지 않을 것”
그는 영화계에서도 활약했다.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출연작이 18편에 달한다. 특별출연 4편을 제외하고, 14편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다. 1년에 한 편 이상이다. 가요계 스케줄을 소화함과 동시에 영화와 곡 작업까지 이어갔다는 이야기다.
원로 가수들은 보통 행사 무대나 디너쇼에서 과거 히트곡들을 부르며 활동한다. 반면 나훈아는 자작곡은 물론 싱글이 아닌 정식 앨범으로 발표하고 젊은 스타들이 주로 하는 체육관 순회공연까지 했다. 단순히 ‘했다’는 데 의의를 두는 수준이 아니라 신곡 발표 때마다 화제를 모은 이 공연은 최대 히트 상품 중 하나였다. 원로 가수임에도 이 정도까지 현재진행형으로 활동한 스타는 조용필 정도가 거론된다. 이래서 우리 사회가 그들을 ‘가왕’과 ‘가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2017년 컴백 땐 젊은 세대까지 열광했다. 당시 그가 자작곡 앨범을 발표하며 새로운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적과 기득권을 내세우며 군림하는 게 아니라 현업의 일선에서 끊임없이 일신하며 모범을 보이는 어른이었다. 그해에 《남자의 인생》이 히트했고 2020년 젊은이들 사이에선 《태스형》 열풍이 일어났다.
젊은 세대가 나훈아를 재인식하면서 그는 ‘멋진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전에 조용필이 《바운스》로 컴백했을 때, 온라인상에서 조용필 관련 에피소드가 회자되며 열풍이 일어났던 것처럼 ‘나훈아 열풍’이 일어났다. 원래 나훈아 팬이었던 이들은 젊은 세대가 나훈아를 칭송하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 신드롬에 가세했다. 그래서 원로가수가 대중문화계 ‘핫 아이콘’이 되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다만 마지막 공연 때 논란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공연 중에 자신의 왼팔을 가리키며 “니는 잘했나.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형제가 어떤 이유가 있어도 싸우면 안 된다고 했다”며 “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국가를 위해서 하는 짓거리인지 묻고 싶다”고 말하면서다.
나훈아는 이전부터 양비론과 세태 한탄으로 젊은이들에게 지지를 받아왔다. 과거 공연장에서 “이상한 국회의원이 나와서 하는 꼴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는 식으로 정치권을 야유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정치권에 대해 양비론과 야유 등을 보낸 것이지만, 이번만은 반발이 터지고 말았다.
현재 국내 정치를 고려하면, 양비론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이 부당하게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국회와 선관위에 군대를 보낸 사건이다. 이건 우리 국체를 위협하는 행위로, 당연히 진압 대상이다. 그 진압의 과정을 일컬어 “왼쪽이 생난리 친다. 형제끼리 싸우는 꼬락서니”라는 식으로 말한 건 전혀 사태의 엄중함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평생 쌓아올린 좋은 이미지에 흠집이 난 셈이다. 엄중한 이슈를 일상적인 여야 간 정쟁 정도로 인식한 것이 문제였다.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겠으나, 그래도 반세기 이상 한국 전통가요의 중심으로 국민을 위로해준 한 시대의 국민가수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