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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제재 말라” 시진핑·푸틴 공동성명…진화하는 북·중·러 연대
北, 우크라 파병 대가로 푸틴 환심 사…김정은, 6월 러 답방 가능성

김정은은 몸이 무겁다. 체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상외교’ 이야기다. 의제와 시간만 맞으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날아가 상대 정상을 만나는 요즘 정상외교 트렌드에 맞지 않게 굼뜨다. 전용기 사정이 녹록지 않은 탓도 크다. 북·러 정상회담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푸틴은 당초 1박2일이던 방북 일정을 축소해 6월19일 새벽 2시 평양에 도착해 이날 저녁까지 당일치기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했다. 러시아를 답방해야 하는 김정은은 필요에 따라 이런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까?

김정은 답방설은 올해 3월부터 모스크바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현지시간 3월27일 러시아의 루덴코 외무차관은 기자들에게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루덴코 차관은 “우리는 언제나 모두와 방문 교환에 대해 협상하고 늘 준비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루덴코 차관이 당시 2주 전인 3월15일 북한을 방문해 최선희 북한 외무상 등과 만나 정상회담을 의미하는 ‘최고위급 접촉’ 등을 논의했다고 밝힌 바 있는 상황이었다.

2024년 6월19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새로운 협력 관계 체결 서명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AP 연합
2024년 6월19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새로운 협력 관계 체결 서명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AP 연합

김정은 “북·러는 ‘불패의 동맹관계’” 강조

이보다 일주일여 앞선 3월21일에는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을 직접 만나 푸틴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러 정상회담 언급 가능성도 제기됐다. 김정은은 지난해 6월 평양을 방문한 푸틴으로부터 모스크바 방문 초대를 받아둔 상태였다. 크렘린궁은 “일정은 외교 채널들을 통해 합의될 것”이라면서도 3월 당시에는 5월9일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 참석을 위해 김정은이 모스크바를 방문하느냐는 질문에 구체적 확인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정은은 5월9일 전승절에 참석하지 않았다.

5월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푸틴은 김정은 대신 러시아를 방문한 북한군 대표단을 만났다. 푸틴은 승전일 기념 연설과 열병식이 끝난 후 연단에서 광장으로 내려와 김영복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등 북한군 대표단 5명과 신홍철 주러 북한대사를 만났다. 김 부참모장이 “위대한 전승절에 (푸틴) 대통령 동지에게 열렬한 축하를 표한다”고 인사하자 푸틴은 두 팔을 벌려 그와 포옹했다. 

김정은은 같은 날 모스크바 붉은광장 대신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을 찾았다. 그는 전승절 축하 연설을 통해 북한과 러시아가 ‘불패의 동맹관계’임을 강조했다. 또한 “위대한 소련 군대와 인민이 파시즘을 타승한 승리의 날이 인류의 운명과 미래에 미친 미증유의 중대한 영향과 영원한 의의”에 대해 말하며 “조로(북·러) 관계의 오랜 전통과 숭고한 이념적 기초, 불패의 동맹관계를 끊임없이 공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우리 당과 정부와 인민의 확고부동한 입장”을 전했다. 

하루 앞선 5월8일에는 시진핑과 푸틴이 모스크바 정상회담을 가진 후 “북한에 대한 제재와 강압적 압력을 포기할 것을 각국에 촉구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를 고리로 한 ‘불패의 동맹관계’에 중국도 한 발 담그는 모양새였다. 북한 비핵화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러시아와 중국은 자신들이 찬성했던 대북 유엔 제재를 해제하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공동성명은 또 “(미국의) 확장된 핵 억제가 지역 안정을 위협한다”고도 했다. 북핵은 용인하면서도 한국에 대해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을 제거하라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했다. 북한으로서는 김정은이 참석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사이다 발언’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러시아 붉은광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린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김영복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상장)이 포옹하고 있다. ⓒ리아노보스티 방송
러시아 붉은광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린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김영복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상장)이 포옹하고 있다. ⓒ리아노보스티 방송

푸틴 강력 요청에 김정은에 힘 실어주는 시진핑

5월9일 김정은의 전승절 축하 연설은 그래서 푸틴과 시진핑의 공동성명에 대한 답사처럼 들렸다. 전승절에 비록 김정은이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번 행사를 계기로 김정은과 푸틴의 ‘브로맨스’는 한층 돈독해진 것으로 보인다. 푸틴과 시진핑이 양국 공동성명에 김정은을 위해 ‘대북제재 포기’ 입장을 담은 것은 푸틴이 강력하게 요청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어려운 결과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은 ‘신냉전’과 진영외교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북·중·러 삼각 연대에는 신중했는데 이번 공동성명에서 그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여 주목할 수밖에 없다. 

관심은 이제 김정은의 러시아 답방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지난해 6월19일 푸틴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열린 북·러 포괄적 전략적동반자관계 조약 체결 1주년과 6·25전쟁 75주년이 몰려 있는 다음 달 답방 가능성이 점쳐진다. 6월이면 한국의 새 정부도 출범하고 미국의 대북 접근도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기다. 한국 새 정부의 대북 입장 선회를 압박하고 미국의 유화적인 대북 접근도 유도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한층 밀착하는 모습이 북한으로서는 유리하다. 다만 마음만 먹으면 당장 모스크바까지 안전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전용기를 갖지 못한 김정은의 사정이 기술적으로 문제라면 문제다. 

전용열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과거 김정일의 2001년 모스크바 방문 사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왕복 24일 정도 걸리는 일정이다. 만약 김정은이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한다면 한국 새 정부 출범기, 미국의 대북 정책 조정기에 한 달 가까이 하이라이트를 받으며 각종 뉴스와 메시지를 쏟아낼 수 있는 일정이다. 하지만 6월에 기술적으로 방러 준비를 마칠 수 있을지, 정치적으로 평양을 한 달 가까이 비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김정은이 참가하는 방식으로 북·러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8월 한미 연합훈련 직후 북·러의 규합 명분도 생길 수 있는 시기다. 그러나 모스크바 방문보다는 임팩트가 떨어질 수 있어 김정은의 고민도 깊어질 것이다. 어느 경우든 6월부터 9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남북, 북·러, 북·미 간 치열한 수싸움이 벌어질 시기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숨 가쁜 올 하반기 일정,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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