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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속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 2시간 만에 ‘빈손’ 종료
법관들 간 입장차 따른 진통…대선 후 정치권 움직임 예의주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부를 둘러싼 논란과 정치권의 공세에 ‘일시적 침묵’을 택했다. 6·3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흔들리는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 확립을 위한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초고속 파기환송 결정이 촉매제가 돼 열린 법관대표회의는 결국 ‘대선 영향 우려’를 떨치지 못하는 딜레마 속에 공전이 불가피하게 됐다. 대선 결과와 새 정부가 내놓을 사법 개혁 정책에 따라 판사들의 공개적인 의견 표명 방향도 변곡점을 맞게 될 전망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린 5월26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린 5월26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선거 영향 우려” 공개 입장 표명 없어

5월26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 임시회의는 예상과 달리 2시간여 만에 결론 없이 종료됐다. 법관대표회의는 각급 법원에서 선출된 판사들이 모여 사법행정과 법관 독립에 관한 의견을 표명하거나 건의하는 회의체다. ‘재판 개입’과 ‘판사 블랙리스트’ 파장이 일었던 사법농단 사태를 계기로 2018년부터 정식 기구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임시회에는 전체 법관 대표 126명 중 88명(오프라인 18명·온라인 70명)이 참석했다. 전체의 30%가 불참했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상고심 판결 논란을 이유로 회의가 소집된 것은 초유의 일이다. 때문에 법조계 안팎과 여론의 이목이 집중됐지만 유의미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법관 대표들이 이날 의결한 것은 6월3일 이후 날짜를 재지정해 회의를 속행한다는 것이 유일했다.

의장을 맡고 있는 김예영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가 직권으로 상정한 ‘사법부 신뢰 회복’과 ‘재판 독립 침해 우려’에 대한 안건 2개, 회의 당일 기준(제안자 외 9명 동의)을 충족해 상정된 5건 등 총 7건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이에 대한 공개적 입장 표명 여부를 결정할 표결 절차는 진행되지 못했다. 법관대표회의 측은 “대선에서 사법 개혁이 주요 의제로 떠오른 가운데 법관 대표들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른쪽)조희대 대법원장이 이례적인 속도로 (왼쪽)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 신속 심리·판결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법조계와 정치권 안팎에서 “사법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판이 거세졌고, 사법부 개혁이 새로운 의제로 떠올랐다. ⓒ시사저널 양선영 디자이너·연합뉴스
(오른쪽)조희대 대법원장이 이례적인 속도로 (왼쪽)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 신속 심리·판결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법조계와 정치권 안팎에서 “사법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판이 거세졌고, 사법부 개혁이 새로운 의제로 떠올랐다. ⓒ시사저널 양선영 디자이너·연합뉴스

의장이 상정한 안건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이 후보 사건 파기환송 결정과 관련해 ‘특정 사건의 이례적 절차 진행으로 사법 독립의 바탕이 되는 사법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것을 심각하게 인식한다’는 것, 정치권 움직임을 겨냥해 ‘재판 독립을 침해할 가능성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와 함께 △‘정치의 사법화’가 법관 독립에 중대한 위협 요소임을 확인 △이 후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사법부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 △개별 재판을 이유로 법관에 대해 과도하게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한 우려 표명 △법관대표회의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공정한 재판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임을 천명하자는 안건이 올랐다.

법관 대표들은 이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이례적 신속 선고와 민주당의 총공세가 모두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과 절차적 공정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사안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지만, 대선 이후 ‘공개 의사 표명 의결’이라는 결과까지 도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법 독립 훼손’과 ‘법치 붕괴’ 우려에 대한 인식은 동일하지만 원인과 진단, 그에 따른 처방을 놓고는 입장차가 있어서다.

이번 임시회 소집 과정에서도 법관들 간에 상당한 이견이 노출됐다. 대법원이 이 후보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후 법원 내부망에는 이를 주도한 조희대 대법원장의 자진 사퇴까지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대법관 증원부터 ‘4심제’ 등 사법부를 겨냥한 입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면서 점차 “정치권이 선을 넘었다”는 판사들의 성토가 팽배해졌다고 한다. 특정 사건에 대한 결정과 개별 법관에 대한 압박, 대법원장 및 대법관에 대한 청문회·특검 움직임까지 보인 민주당의 대응이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면서 사법부 내 반발을 키웠다는 것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임시회는 전체 구성원 중 5분의 1 이상(26명)이 찬성해야 개의가 가능하다. 당초 진행된 투표에선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다가 시한을 연장한 끝에 겨우 이를 달성하는 진통을 겪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법원 판결과 그 과정의 논란에 대해 법관대표회의가 공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사법부 스스로 재판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는 지점인 데다 입법부의 파상공세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이 더 우세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판사 출신 문유진 변호사(법무법인 판심)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입장 채택을 하지 못한 것은 법관대표회의가 전국 법관의 절대 다수나 과반수의 의견과 동일하다고 단정 짓기 어렵고, 자칫 ‘사법부의 정치화’로도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이와 별도로 사법부의 독립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삼권분립 체제에서의 명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장을 발표했어도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조희대 대법원장 등 사법부의 대선개입 의혹 진상규명 청문회'가 열린 5월1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 연합뉴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조희대 대법원장 등 사법부의 대선개입 의혹 진상규명 청문회'가 열린 5월1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 연합뉴스

사법부를 또 다시 ‘사법의 정치화’ 한가운데로 몰아넣을 수도 

법관대표회의가 대선 이후 다시 열리게 되면서 새 정부 출범 영향에 따라 안건이 변경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선거 직전까지 부동의 여론조사 1위를 유지한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사법 개혁이 급물살을 타게 되면서 사법부 차원의 목소리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대선 이후 추진될 주요 사법 개혁 추진안과 보폭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5월28일 공개한 이 후보의 정책 공약집에는 검찰 및 사법 개혁 추진과 함께 대법관 증원안도 담겼다. 논란이 컸던 ‘비법조인 대법관 임명’과 ‘대법관 100명 증원안’은 사법부 장악 시도라는 역풍 우려 속에 철회했지만, 규모의 문제일 뿐 현행 14명(대법원장 포함)에 불과한 대법관 증원은 필수 과제라는 게 이 후보와 민주당의 공통된 인식이다. 구체적 증원 숫자와 임명 방식에 대한 밑그림은 나오지 않았지만 ‘30명 증원 법안’을 그대로 남겨둔 만큼 이에 준하는 규모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대법관 증원은 20년 넘게 이어져온 사법부의 주요 과제지만, 이 후보에 대한 파기환송 결정 직후 진행됨에 따라 ‘입법, 행정에 이은 사법부 장악 시도’ ‘사법부 옥죄기’ ‘졸속 추진’ 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파기환송심을 포함한 5개의 형사재판 계속 여부도 대선 이후 최대 쟁점 사안이다. 앞서 대법원은 당선 전 진행 중이던 형사재판의 계속 여부는 개별 재판부가 판단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5개 재판이 모두 멈추거나 반대로 전부 진행될 수 있고, 일부는 진행, 일부는 중단 등으로 엇갈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민주당은 이 후보의 허위사실공표 혐의 구성요건인 ‘행위’를 법안에서 삭제한 뒤 이를 소급 적용해 ‘면소’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피고인 후보자의 대통령 당선 시 재판을 중단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이 개정안들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되면 사법부 차원의 법률 해석이나 판단은 배제된 채 이 후보에 대한 형사재판에는 모두 제동이 걸린다. 민주당이 입법을 통해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결과적으로 ‘법원의 시간’을 삭제하게 되면서 이에 따른 충돌과 논쟁이 불가피해지고, 사법부를 또다시 ‘사법의 정치화’ 한가운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법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소수가 주도해 열린 이번 안건으로는 법관대표회의 차원의 공개적인 의견 표명으로까지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새 정부가 내놓을 사법 정책을 예의주시하면서 재판 독립과 공정성 확보,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낼 방안을 숙고하고 이에 신속 대응해 나가자는 논의와 동력 확보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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