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도 모르고 이름도 없던 ‘소년공’…책상에 압핀 박고 독하게 공부
학연도 지연도 없는 ‘무명 정치인’…생존본능 발휘해 대권가도까지
이재명의 주무대는 변방이었다. 깡촌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에는 학교보다 공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치 인생도 그랬다. 정치인으로서 첫발은 여의도가 아닌 경기도에서 뗐다. 당내에서도 존재감 없는 비주류 중 비주류였다.
‘변방의 벼룩’은 결국 중심부로 펄쩍 뛰어올랐다. 2016년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이름 석 자를 전국에 각인시켰고,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의 민주당을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탈바꿈시켰다. ‘윤석열의 몰락’을 발판 삼은 이재명은 보수의 영토로까지 확장을 꾀했다. 결국 이재명은 마지막 파고를 넘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
李, 정성호·문형배와 사법연수원에서 도원결의
이재명 대통령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수저’다. 이 대통령은 1963년 10월23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인 이유는 어린 시절 먹고살기 바빠 그의 모친 고(故) 구호명씨가 정확한 출생일을 기억하지 못해서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생년월일 기록이 필요해지자 ‘점밭이’(점쟁이)를 찾아가 길일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화전민이었던 가족은 겨울이면 방 안에 둔 물그릇이 얼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부친 고(故) 이경희씨는 노름으로 가산(家産)을 탕진했다. 하루는 모친이 밭을 갈려고 나갔는데, 다른 사람이 쟁기질을 하고 있어 그제야 하나 남은 땅뙈기마저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생길 때마다 밤에 몰래 모여 화투장을 쪼였다. 도박 습벽이 들어 집문서, 땅문서까지 잡히다 보니 결국 없는 재산이나마 거덜이 나고 말았다.” 이 대통령은 2006년 블로그에서 아버지를 이같이 기억했다.
이 대통령은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마찌꼬바’(가내공장)의 ‘시다’(시다바리)가 됐다. 경기 성남시 오리엔트시계 공장에 취직한 그는 이름 없는 ‘소년공’이었다. 소년공은 6년 동안 고무와 시계, 냉장고 등을 만들고 일당 200원을 받았다. 배가 고프면 시장에 버려진 썩은 과일을 먹었다. 여섯 번째로 취직한 야구 글러브 공장에선 프레스에 팔이 끼여 비틀어지는 바람에 평생 장애를 안게 됐다. 이때 두 번의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할 만큼 힘겨웠다고 한다.
지독한 가난은 생존의 원동력이 됐다. 이 대통령은 서울 신답동에 있는 입시학원에 등록해 하루 두 시간씩 자며 공부했다. 독서실 책상에 압핀을 박기도 했다. 행여 엎드리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면 곧바로 압핀에 찔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압핀에 찔린 채 잠시라도 잠에 들면 야산에 올라가 작대기로 온몸을 매질했다. 독하게 공부한 끝에 1982년 중앙대 법대생이 됐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본격 출세가도를 달린다.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문무일 전 검찰총장 등 10여 명과 함께 ‘노동법학회’를 만들어 사회 변혁에 뛰어들자고 도원결의를 한다. 훗날 이 모임은 대통령과 수많은 정치인, 정무직 기관장을 배출한 국내 최대 진보 법조단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인적자원이 됐다. 연수원 2년 차에는 서울 서소문동에 있는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시보 생활을 했는데, 이는 판검사가 아닌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이 됐다.
교회 지하실에서 “내가 세상 바꾸겠다” 다짐
성남의료원 설립 무산 사건은 ‘법조인 이재명’에서 ‘정치인 이재명’으로 발돋움하는 계기였다. 2003년 성남시 종합병원 두 곳이 폐업하자 이 대통령은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성남 시민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상정됐지만, 당시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했던 시의회가 토론도 없이 47초 만에 이를 부결시켰다. 그는 시민들과 거세게 항의하다 특수공무방해죄로 수배되기까지 한다.
경찰에 쫓기던 이 대통령은 성남의 한 교회 지하실에 몸을 숨긴다. 이곳에서 그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며 정치에 뛰어든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첫 선거인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고, 2008년 총선에서도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 2010년 재도전 끝에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시장 취임 후에는 청년배당·무상교복·공공산후조리 지원 등 ‘3대 기본 시리즈’를 내놓았다.
유능한 행정가의 면모를 보였지만 당내에선 여전히 비주류에 속했다. 정치적 발판으로 여겨졌던 학연이나 지연도 없는 ‘무명 정치인’에 그쳤다. 그런 이 대통령은 2016년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전국구 정치인’이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가장 먼저 외쳤고, 이른바 ‘사이다 발언’으로 존재감을 부각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대권가도에 올라탔다. 2017년 민주당 제19대 대선 경선에서는 문재인·안희정 후보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후 2018년 6월 경기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치적 몸값을 키웠다. 이때 ‘기본 시리즈’를 무기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쌓았고,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방역 지침에 협조하지 않은 신천지 교단을 상대로 강경 대응하는 등 ‘사이다’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다만 이때부터 이 대통령의 사생활과 사법 리스크도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했다. 배우 김부선씨와의 스캔들, 배우자 김혜경 여사의 ‘혜경궁 김씨’ 논란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특히 ‘친형 강제 입원’과 관련해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21년 두 번째 대선 출사표를 던졌으나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 측이 제기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끝내 본선에서 발목을 잡았다. 결국 0.73%포인트 차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대권을 내줘야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대선 패배 직후에도 쉬지 않고 곧바로 등판했다.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2022년 8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대표에 올랐다. 그는 이때부터 당 체제를 본인 중심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정치 생명뿐만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위기도 있었다. 총선 정국이었던 2024년 1월,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 방문 도중 칼에 목을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동맥 손상을 피해 목숨을 건진 뒤 이끈 총선에선 범야권 192석이라는 압승을 거뒀다.
12·3 비상계엄 당시 야당 대표로서 계엄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뒤 윤 전 대통령의 탄핵까지 완수한 순간, 사실상 대선 재도전도 확정된 셈이었다. 대권에 도전한 이 대통령은 경쟁 후보였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을 끌어들였고 보수 인사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이석연 전 법제처장, 권오을 전 한나라당 의원 등도 적극 포섭했다.
“흉기 든 괴한조차도 대통령직 올라서는 것 못 막아”
이재명 대통령이 ‘인생 역전’의 서사를 쓸 수 있었던 데는 ‘끊임없는 연구’와 ‘선제적 대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성남시장, 경기지사를 거치면서 행정가로서 현안을 두루 파악하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논란을 낳긴 했지만 ‘호텔경제학’과 ‘커피 원가 120원’ 등 어젠다를 꺼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란 평을 받는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전력을 다하는 것도 이 대통령의 특징으로 꼽힌다. 대선 패배 직후에는 이른바 ‘비명횡사’ 공천을 통해 민주당을 일극체제로 만드는 등 리더십을 더욱 공고히 했다. 윤석열 정부가 사법 리스크로 압박하자, 탄핵소추안 발의와 예산 감액 등으로 거칠게 반기를 들었다. 이번 대선 TV토론에서도 그 면모는 더 도드라졌다. ‘형수 욕설’ ‘아들 논란’ 등 자신을 향한 맹공에는 즉답을 하지 않거나 다른 프레임으로 빠르게 전환해 반격했다. AFP통신은 이 대통령의 당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소송과 스캔들, 무장 군인, 흉기를 든 괴한조차도 그가 소년공에서 대통령직 문턱까지 올라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르포] “재매(재명)이? 어릴 때 밥도 지대로 못 묵었다…마을에선 신동”
단 70명밖에 살지 않는 오지 중 오지. 하루에 버스가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산골마을.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 마을 얘기다. 이곳은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사저널은 6월1일 경북 안동역에서 자가용으로 약 1시간 걸리는 지통마 마을을 찾았다. 이곳에서 이 대통령의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와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6월1일 경북 안동역에서 42km 떨어진 지통마 마을로 향했다. 예상 소요시간은 1시간. 시내를 벗어나니 왕복 차로 구분이 없는 좁은 도로가 이어졌다. 야트막한 구릉 서너 개를 지나고 안동호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일반도로가 끊겨 자가용이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곳에 이재명 대통령의 생가터가 있었다. ‘생가터’인 이유는 오래전 이 대통령의 집이 철거됐기 때문이다. 현재는 나뭇가지와 덤불만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제20대 대통령 후보 이재명 생가터’라는 푯말이 이곳에 그의 집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어디서 왔능교?” 생가터 바로 앞에 살고 있는 한 노인이 말을 걸었다. 이 대통령의 부친 고(故) 이경희씨의 친구 권오선씨(90)였다. 다섯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동네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재매이 어른(부친)이 경북 영양에서 선생을 했어. 여기서는 동장도 하고, 담배 총대(조합장)도 했제”.
이 대통령이 어릴 적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부친은 그 당시 청구대학교(현 영남대)에 다녔을 정도로 고학력자였지만, 농사일에는 영 익숙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권씨가 말했다. “선생 하다가 농사질(지을) 줄 알겄나. 식구가 아홉이다. 밥도 제대로 못 묵었다. 여(지통마)서도 가난한 축에 속했어. 초가집이었는데 그것도 집주인이 나가라니까 이사 다녔지. 한 서너 번은 옮겨 다녔을걸”.
예안면 도촌리 경로당에서 만난 이순여씨(70)의 기억도 비슷했다. “재맹씨네가 담배 농사를 지었는데 그 당시에 비료가 있나 뭐가 있나…. 농사가 되려야 될 수가 없지요. 옛날에는 다 가난했어”.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이 대통령은 마을에서 소문난 ‘신동’이었다. 그는 삼계국민학교(현 월곡초 삼계분교)를 다녔다. 집에서 6km 떨어진 곳이다. 포장도로가 깔리기 전에는 산을 넘고 개천을 따라 꼬박 20리(약 8km)를 걸어 다녔다고 한다. 권씨는 “재매이가 똑똑하게 말도 잘했지. 아부지 닮아가 고집도 있었다”며 웃어 보였다.
그런 이 대통령을 모친인 고(故) 구호명씨도 자랑스러워했다. “냇가에 빨래하러 가면 꼭 재맹씨 엄마가 ‘새댁들요, 내 7남매 어머니로서 한마디 함시오’ 이래(이렇게) 말한 게 아직 기억납니더. 아(아이)가 똑똑했으니까 기분 좋았는 갑지요.” 김분금씨(78)는 그의 모친을 이렇게 기억했다.
다만 이 대통령이 지통마 마을을 떠난 이유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사를 갔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다.
고향을 떠난 후에도 이 대통령은 종종 지통마 마을을 찾은 것으로 알려진다. 조부모 묘소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김씨는 “재맹씨 해마다 옵니더. 작년에도 왔다 가고. 산소가 여기 있으니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