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초’ 대통령 vs ‘임기 말’ 한은 총재의 시각차…與 “이창용, 오지랖 넓다”
이 총재 “물가·금융 안정은 한은의 책무”…금융감독체계 개편이 ‘화약고’
이재명 대통령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 과거부터 ‘더 많은 역할과 목소리를 내는 한은’을 지향해온 이 총재가 새 정부 들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다. 민생지원금부터 스테이블코인, 가계대출 등 이재명 정부의 주요 정책을 둘러싼 시각차가 곳곳에서 드러나자 여당에서 “오지랖이 너무 넓다”는 비판까지 나온 상황이다.
이러한 양상은 정부와 중앙은행 간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미국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현재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갈등보다는 ‘견제’에 가까운 양상이지만, 정권 초반의 대통령과 임기 말의 총재가 주요 현안을 두고 반복적으로 견해차를 보일 경우 향후 불협화음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둘러싸고 한은이 주도권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 총재의 ‘오지랖’이 더 넓어질지에 관심이 모인다.
현재 이 총재의 ‘시끄러운 행보’는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절간같이 조용하다고 해서 ‘한은사(寺)’로 불린 한은을 좀 더 적극적인 정책기관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그의 오랜 포부였다. 2022년 3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한은 총재에 임명된 이래 국내외 기업, 정부·기관과의 협업은 물론 정치권 인사를 적극적으로 만나는 등 사회 현안에 대해 가급적 입을 닫고 통화정책에 집중해온 과거 총재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왔다.
이런 이 총재의 지론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서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논쟁적인 제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3월에는 차등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자는 보고서를 내면서 노동계와 갈등을 빚었다. 보고서 발표 이후 한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은 건물 앞에서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시위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그해 11월에는 당시 여당이던 국민의힘이 경기 김포시를 서울에 편입하는 ‘메가시티 서울’ 공약을 내놓은 뒤에 “지역 거점도시를 육성해야 한다”는 정반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창용 “보편보다 선별 지원이 더 효율적”
이 총재가 정부 정책에 견제구를 던지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정부 출범 초반임에도 주요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면서 대통령과의 시각차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대표 사례가 새 정부의 핵심 정책인 ‘전 국민 민생지원금’이다. 이 총재는 이 대통령이 민주당 당대표 시절이던 때부터 민생지원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강조해 왔다.
지난 1월 민주당이 추가경정예산안(추경) 편성을 통해 ‘전 국민 25만원 지원금’을 추진하자 이 총재는 “전 국민에 지원금을 주면 잘되는 자영업자만 더 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전 국민 지원금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추경이 편성된 후에도 “재정의 효율성 차원에서 보편적인 지원보다 어려운 자영업자 등을 선택적으로 지원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반대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이 대통령의 핵심 경제 공약 중 하나인 가상자산에 대해서도 이견이 엿보인다. 한은은 정부가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비(非)은행권에도 허용하려는 것에 대해선 반복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 속도감 있는 정책 추진을 위해 관련 법안을 잇달아 발의한 상태지만, 이 총재는 “19세기 민간 화폐 발행이 활발했던 시기의 혼선이 반복될 수 있고 통화정책 수행이 어려워 결국 중앙은행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 총재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민주당과 각을 세운 바 있다. 12·3 비상계엄 이후 공석이 된 헌법재판관 인선을 두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가 추천한 인물 3명 중 2명만을 임명해 논란이 일었을 때, 이 총재는 “최 대행이 대외신인도 하락과 국정 공백 상황을 막기 위해 정치보다는 경제를 고려해서 어렵지만 불가피한 결정을 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최 대행의 임명권 행사가 민주당의 향후 탄핵 논의에도 영향을 준 사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총재가 정치적 파장을 감수하면서도 소신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렇듯 이 총재의 견제구가 이어지자 최근 여당에선 이례적인 비판까지 나왔다. 가계대출이 치솟던 지난 6월 이 총재는 은행장들과 만나 “가계대출 관련 리스크(위험)가 재확대하지 않도록 은행권의 안정적 가계부채 관리가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이언주 민주당 최고위원은 “한은 총재가 할 말이 있으면 대통령 면담을 신청하든가, 대통령실에 조용히 전달하면 되지 ‘언론플레이’를 할 일이 아니다”며 “자숙하고 본래 한은의 역할에 충실하게 관리를 잘하라”고 직격했다.
이 총재는 이에 대해 “한은 입장에서는 하는 모든 일이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이라는 맨데이트(책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다. 계속 맨데이트 안에서 연구를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앞으로도 정부의 경제정책 등에 목소리를 아끼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총재 임기가 내년 4월까지로 약 10개월 남은 가운데, 정치권과의 긴장 국면이 이어질 가능성도 점쳐지는 이유다.
총재 임기 내년 4월까지…긴장 국면 이어지나
최근 미국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올해 초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동안 경기 부양을 촉진하기 위해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어서다. 반면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물가와 고용 지표 등 데이터에 기반한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는 양상이다. 파월 의장은 연이은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도 “관세 여파로 고물가와 저성장이 나타날 것이 확실하다”며 점진적인 정책 운용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을 두고 ‘정부 내 가장 파괴적인 인물’ ‘얼간이 같고 멍청한 사람’이라며 사퇴 압박까지 가하고 있다. 전례 없는 해임 절차가 실제로 진행될 경우 미국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법적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런 미국에 비하면 이 대통령과 이 총재의 관계는 갈등보다는 견제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압박과 달리, 이 총재와 이 대통령의 시각차는 주로 정책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또 과거부터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이 주로 기준금리 인하 여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 금리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은 이 대통령과 이 총재가 본격 충돌할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한은이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놓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면전에 나서는 분위기라 양측의 갈등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은은 거시 건전성 정책 수단뿐만 아니라 미시 건전성 감독 권한도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국정기획위원회에 전달한 상태다. 현재 한은이 단독으로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에 대한 권한을 확대하겠다는 게 한은의 의도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는 생각이 다르다. 국정기획위는 금융위원회의 금융정책 기능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금융감독 기능은 금융감독원에서 금융감독위원회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런 구상에서 한은은 바깥으로 밀려난 분위기다. 이와 같은 갈등이 증폭된다면, 앞으로 더 시끄러운 한은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