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 책임 명시한 책무구조도 도입…총수 일가도 대상 포함
미래에셋·대신·키움, 오너 이름 슬그머니 뺐다가 금감원에서 제동
‘금융권의 중대재해처벌법’으로 불리는 책무구조도가 시행된 지 20여 일이 흘렀다. 책무구조도란 금융 사고가 발생한 회사 경영진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건설회사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대표이사뿐 아니라 경영에 책임이 있는 오너까지도 중대재해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금융회사도 마찬가지다. 내부통제 부실 문제가 생길 경우 책무구조도에 이름이 기재된 총수 일가까지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의도 덮친 책무구조도 시행 ‘후폭풍’
금융권은 납작 몸을 웅크렸다. 금융 당국의 눈치를 보면서 조직 개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금융권이 우선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겸직 문제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국내 53개 금융투자회사 및 보험사 경영진의 절반 가까이가 현재 두 직책을 겸하고 있다. 내부 사정에 밝은 CEO에게 이사회 의장까지 맡겨 효율성을 꾀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돼 있는 만큼 이사회가 오너 일가의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동안 적지 않았다.
금감원 역시 책무구조도 도입을 앞두고 ‘경영과 감독의 분리’를 금융권에 권고해 왔다. 주요 금융그룹은 발 빠르게 후속 조치에 나섰다. KB자산운용과 메리츠증권, 유안타증권, ABL생명, 라이나생명, 메트라이프, DB손해보험 등 상당수 회사가 이사회 의장 자리를 사외이사에게 넘겼다.
오너가 있는 금융그룹의 풍경은 더했다. 신영증권은 지난해까지 원종석 회장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직을 겸임해 왔다. 하지만 올해 6월 정기주총에서 원 회장은 대표이사 자리를 내려놨다. 2005년 원국희 창업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지 정확히 20년 만이다. 재계는 책무구조도 도입에 따른 선제적 조치로 보고 있다. 현대해상의 경우 정몽윤 회장의 장남인 정경선 전무를 최근 최고지속가능책임자(CSO) 직책에 더해 주요업무집행책임자로도 선임했다. 용어는 복잡하지만 결국은 2세 승계를 앞두고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일부 그룹은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금감원의 권고에도 오너가 대표(사내)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유지하고 있는 금융회사가 아직 적지 않다. 한국투자증권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현재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회장이 사내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다. 김 회장은 심지어 이사회 산하 소위원회인 경영위원회 의장직도 맡고 있다.
교보생명과 대신증권, 유진투자증권 등도 비슷하다. 교보생명의 경우 신창재 회장이, 대신증권은 오너 3세인 양홍석 부회장이, 유진투자증권은 유력 후계자인 유창수 부회장이 대표(사내)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다. 이들 회사는 “오너 일가가 금융 분야에서 오래 재직해온 만큼 회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서 “금감원이 최근 경영과 감독의 분리를 권고하고 있지만 각자대표나 선임사외이사 제도를 통해 약점을 보완하고 있는 만큼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금융권 일각의 시각은 달랐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현재 금융회사 CEO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가 보편화돼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나 금융안정위원회(FSB) 등 관련 기관 역시 ‘경영과 감독의 분리’를 권고하고 있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겉으로는 ‘글로벌’을 표방하면서 실상은 CRO(최고위험관리책임자)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글로벌 표준을 피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표이사·의장 겸직 두고 줄다리기 ‘팽팽’
무엇보다 2022년 초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들은 CSO(최고안전책임자) 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재계에서는 “CSO 자리가 오너들의 책임 회피를 위한 방패막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금융권의 CRO 직책 신설이나 강화 움직임 역시 실상은 오너 리스크 회피용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한 임원은 “금융회사는 제조회사보다 취업 규칙이 더 까다롭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오너 일가가 법적 처벌이나 금감원의 문책성 경고를 받을 경우 경영에서 배제될 수 있다”면서 “최악의 경우 2세 승계구도를 다시 짜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종의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22년 1월 광주광역시 화정동에서는 아이파크 아파트가 갑자기 붕괴돼 근로자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룹 회장과 지주회사인 HDC 회장직은 유지한 상태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한 현대산업개발 회장직만 내려놓았다. 당시, 얼마 후 시행될 중대재해법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겠냐는 뒷말이 재계에서 나왔다.
금융권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은행권에서는 금융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올해에만 벌써 5대 시중은행에서 1000억원대에 이르는 금융 사고가 발생했다. 금융투자회사나 보험사로 범위를 확대할 경우 피해금액은 더 증가할 수 있다. 사고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도입된 책무구조도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는 게 경영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금감원이 최근 미래에셋과 대신증권, 키움증권 등의 오너 일가를 상대로 강공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책무구조도 시행을 앞둔 지난 6월, 금감원은 미래에셋증권에 박현주 회장을 포함시킬 것을 권고했다. 박 회장이 그룹 경영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걸맞은 책무를 부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미래에셋증권은 금감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회장의 현재 직책은 글로벌전략가(GSO)다. 담당 업무는 해외기업 투자와 M&A(인수합병), 경영 자문을 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자문이다. 국내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만큼 박 회장을 책무구조도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그룹 매출의 30~40%가 해외사업 부문에서 나온다”면서 “국내 회사 내부통제 부실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책무구조도에 해외사업 부문을 총괄하는 회장님을 포함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추세도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도 창립자지만 명예직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실무자의 의사결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을 경우 책무구조도에서 제외하고 있다. 운용 자산 기준으로 글로벌 1위 회사인 블랙독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의 공동 창립자인 수잔 와그너는 현재 경영에서 은퇴하고 비상임 이사 직책만 맡고 있다. 미국 최대 증권사인 찰스 슈왑 코퍼레이션이나 일본에 기반을 둔 글로벌 투자회사인 소프트뱅크그룹의 창립자인 찰스 슈왑 명예회장이나 손정의 회장 역시 승인권이나 실무 권한은 없고 전략적 자문만 하고 있다.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다?
회사 측은 박 회장을 책무구조도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한 금감원에도 이런 부분을 강조했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금감원은 미래에셋 측 주장을 수용했다. 대신 추후 검사나 조사 과정에서 (박 회장이) 어떤 식으로든 국내 사업에 관여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가중 처벌한다고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움증권과 대신증권은 미래에셋증권과 반대 행보를 보였다. 금감원의 권고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여 오너 일가 이름을 책무구조도에 반영했다. 요컨대 김익래 전 다우키움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준 키움프라이빗에쿼티(PE) 대표는 현재 키움증권에서 별다른 직책 없이 비상근 사내이사만 맡고 있다. 하지만 키움증권 이사회 멤버로 회사의 주요 안건을 보고받아 왔다. 경영권 승계도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다. 다우키움그룹의 지배구조는 현재 ‘이머니→다우데이터→다우기술→키움증권’으로 이어진다. 김 대표는 이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는 이머니의 지분 33.1%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그럼에도 회사에 직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책무구조도 기재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면서 눈총을 받았다. 오너로서 권한만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논란이 이어지고 금감원의 압박이 계속되자 키움증권은 결국 김 대표를 이사회 공동의장으로 선임했다.
대신증권도 마찬가지다. 금감원은 최근 정기감사에서 이어룡 회장에 대한 책무구조도를 지적하면서 보완을 요구했다. 이 회장이 그룹 ESG 위원회 총괄인데, 책무구조도에 이름이 빠진 게 문제가 됐다. 대신증권은 뒤늦게 그룹 ESG 관리 업무와 관련된 책무를 추가로 반영했다. 회사 관계자는 “이 회장이 그룹 총괄이어서 증권에는 책무를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금감원 정기감사에서 문제가 지적됐다”면서 “책무구조도가 실시된 7월3일 이전에 서류를 보완해 제출한 상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른 논란 역시 당분간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