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당의 굴레’ 갇혀 있는 한 미래 없어…대한민국 먹여 살릴 능력 입증해야
쇄신 외치는 대신 ‘전위대’로 전락한 의원들…남 탓만 하는 ‘비겁함’ 극복해야
국민의힘은 죽어가고 있다. 영혼을 빼앗긴 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로 변해 가고 있다. 정당은 정권 획득이 목표인 조직이어서 대선에서 패배하면 후유증을 앓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은 지친 몸보다 병든 영혼이 더 문제다.
국민의힘의 현재를 상징하는 인물이 있다. 전직 학원강사 전한길. 그는 비상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외치며 극우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전씨는 자신이 ‘국민의힘의 주인’이라며 8월말 당대표 경선에서 자기가 선택한 후보를 당선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대놓고 선거 개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를 징계하기는커녕 윤상현 의원이 연 세미나에 몰려가 계엄의 정당성과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그의 강연을 들었다. 전씨는 이제 자기가 아니면 국민의힘이 망한다는 헛소리까지 늘어놓고 있다.
PK 유권자 이탈 중…TK로 쪼그라들어
하지만 국민의힘은 전씨가 있거나 없거나 거의 망한 게 사실이다. 한국갤럽의 7월 셋째 주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19%로 민주당 지지율(46%)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대구·경북(TK)을 제외한 전 지역, 70대 이상을 뺀 전 연령층에서 국민의힘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다른 조사기관들의 결과도 비슷하다.
정치는 생물이고 여론은 변한다. 인내가 필요하고 여론조사 몇 번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국민의힘 비호감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중이고, 쉽게 바뀔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주류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은 어쩌다 이 꼴이 됐을까. 국민의힘은 다음 네 가지 이유로 망가지고 있다.
첫째, 영남당의 저주. 박정희 이후 TK와 PK(부산·울산·경남)는 보수의 뿌리였고 위기의 순간마다 구원투수가 돼줬다. 과거의 보수는 영남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모두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은 ‘영남만의 힘’일 뿐이다. 그나마 대선 패배 후 부산, 경남이 이탈 중이어서 머지않아 ‘TK만의 힘’으로 쪼그라들 것 같다.
1987년 6공화국이 출범했을 때 민주당은 김대중(DJ)의 호남당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여러 번 허물을 벗었다. DJ는 정권을 잡기 위해 충청도 맹주 김종필(JP)과 연합했고 그 뒤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등 영남 출신들이 민주당 후보로 나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22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전국 17개 선거구 중 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총 159석의 의석을 배출했다. 명실상부한 전국 정당이 된 것이다.
그에 반해 국민의힘은 처참하다. 서울, 경기, 인천의 수도권 121석 가운데 국민의힘 의석은 불과 19석이다. 전남, 전북, 광주, 대전, 제주, 세종에선 0석이다. 전체 국회의원 300명 중 국민의힘이 107명인데 비례대표 18명을 빼면 지역구는 89명이다. 영남 지역이 절대다수인 60명이다. 수도권 당선자들도 따지고 보면 영남 출신이 많다.
영남 유권자들은 “열심히 응원하고 찍어줬더니 이젠 우리가 짐이냐”며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사실 영남 유권자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들의 전폭적 지지를 당의 변화와 개혁의 동력으로 삼는 대신 당권 장악과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만 써먹어 왔던 영남 정치인들이 문제일 뿐이다. 이 기득권을 털어내지 않는 한 국민의힘 미래는 암울하다.
국민의힘이 망가진 두 번째 이유는 무능이다. “좀 부패했지만 능력이 있잖아?” 보수 정치는 오랫동안 그런 평가를 받아왔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소양강댐을 건설하고 의료보험제도와 근로자재형저축을 도입하고, 수출 드라이브를 통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사람들. 그 과정에서 떡고물 챙기고, 특혜 시비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강의 기적과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만든 능력 있는 집단이 보수였다.
하지만 요즘 보수가 능력 있다고 평가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AI(인공지능) 시대가 열리고, 코인경제가 지구촌을 흔들고, 지구온난화, 저출산, 일자리 문제 등 위기와 기회가 한꺼번에 몰려오는데 보수는 아무런 비전도 대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걸 못 하긴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수는 진보가 집권하면 경제와 민생이 망하니까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 오지 않았나. 소금이 짜지 않으면 쓸모가 없듯 능력 없는 보수는 존재가치가 없다.
세 번째는 정치적 영혼과 양심을 팔아버린 의원들이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도, 제왕적 총재 시대에도 갓 당선된 초선들은 개혁적이었다. 20여 년 전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의원이 ‘남원정’이란 이름으로 당의 개혁과 쇄신을 주도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에서 초선들은 친윤 세력의 전위대로 전락해 버렸다. 2023년 3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초선 의원 50명이 나경원의 불출마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가장 개혁적이어야 할 초선들이 윤 대통령이 염두에 둔 특정인을 당대표로 만들기 위해 공작정치에 앞장선 것이다. 2024년 7월 당대표 경선 때도 친윤 성향 원외 당협위원장들이 한동훈은 출마하지 말라는 연판장을 돌리려다 실패했다.
보수 정치의 핵심은 ‘책임정치’
초선뿐 아니라 중진 의원들도 양식과 양심을 의심받긴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3~5선 중진의 발언에 무게감이 있었고 당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구심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 중진들은 그저 ‘기득권의 힘’이란 조롱을 받고 있을 뿐이다. 국회 로텐더홀 텐트 농성이나 하면서 국민 염장을 지른다.
네 번째로 꼽아야 할 것은 비겁(卑怯)이다. 윤 전 대통령과 당시 국무위원, 국민의힘 의원들 대다수의 행동양식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는 비겁해서 망했다.
12월3일 비상계엄이 터졌을 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는 국회 본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국회 앞에서 경찰이 막자 기다렸다는 듯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혀를 찼다. 똑같은 상황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국회 담을 넘었다. 한덕수와 김문수의 단일화 시도도 마찬가지다. 단일화를 한다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김문수나 쿠데타 꼼수로 한덕수를 옹립하려 한 친윤이나 비겁의 무게를 따진다면 거기서 거기다.
윤 전 대통령은 구속되기 전 친윤들이 전화도 안 받는다며 불평했다. 그 많던 친윤들은 윤 전 대통령의 재판정과 특검 출두 현장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 자신도 계엄 당시 사령관들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니 누굴 원망할 것도 없다.
영남당의 굴레에 갇혀 있는 한 국민의힘에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다는 걸 입증하지 못하면 국민이 보수 정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고, 정치적 양심과 영혼을 팔아버린 듯한 의원들에게 표를 줄 리도 만무하다. 무엇보다 보수 정치의 핵심은 책임정치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윤 전 대통령부터 국무위원, 국회의원들까지 줄줄이 남 탓만 하는 비겁함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보수 정당은 궤멸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 어려운 난제들을 국민의힘은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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