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현권 전 민주당 의원 “한미 협상으로 시간 벌어…농업 체질 개선할 때”
민주당 ‘농안법’에 공개 반대…“농산물 가격 보장 정책, 전 세계적으로 실패”
정부가 결국 쌀과 소고기를 지켜냈다. 미국의 강한 시장 개방 요구에도 한국은 이른바 ‘민감품목’으로 불리는 쌀과 소고기의 추가 개방을 차단했다. 7월31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브리핑을 통해 “국내 쌀·소고기 시장은 추가 개방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정치권과 농민단체는 한목소리로 “잘 막았다”며 ‘선방’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 협상 결과는 종료가 아니라 유예에 가깝다. 언제 다시 미국이 개방 압박을 가할지 알 수 없고, 그때도 지금처럼 방어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 한국 농업은 정부의 시장 개입과 관세 장벽에 의존해 겨우 버티는 구조다. 소농 중심의 낮은 생산성과 고령화된 노동력, 비효율적인 유통 시스템은 언제까지나 ‘정책 보호막’ 안에만 머물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 우리보다 먼저 협상에 나선 일본은 미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했다. 같은 압박이 다시 한국을 향해 몰려올 가능성이 높다. 20대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 소속으로 문재인 정부의 농정 개혁을 주도한 김현권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는 단지 시간을 번 것뿐”이라며 “이 시간을 구조 개혁의 골든타임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업 자체가 튼튼해져야 다음 통상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추진 중인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개정안에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농안법은 쌀을 포함한 주요 농산물값이 일정 가격 아래로 떨어졌을 때 정부가 농가에 차액을 보전해 주는 것이 골자다. 김 전 의원은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당장은 농민 보호라는 명분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소농 중심 구조를 고착화시켜 농업의 체질 개선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농업 구조개혁하면 미국의 추가 개방 요구에 대응 가능”
한미 관세 협상을 총평한다면.
“정부뿐 아니라 정치권, 기업들 모두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한 모습이 보여 상당히 흐뭇하게 생각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는 정당하지 않은 방식과 내용이 많았지만 우리는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협상팀이 열심히 대응한 것 같다. 정치권도 대사관 앞에서 항의하고 농산물 개방에 대응하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기업들도 조선업 해외 진출, 에너지 관련 투자 조율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부, 정치권, 기업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본다.”
쌀과 소고기 추가 개방을 막았다.
“식량 안보와 관련된 문제는 주권적인 사항이다. 따라서 관련 정책은 스스로 판단해 펼쳐야지 외부에 떠밀려 해서는 안 된다. 이번 협상에서 그런 주권적 입장을 관철한 건 잘한 일이고 어려운 협상 과정을 잘 넘겼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은 시간을 번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을 활용해 농업의 구조 개혁을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 다른 산업들은 자체 경쟁력을 가지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있는데, 농업도 이제 구조 개혁을 통해 그 길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번 협상을 그런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농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핵심은 생산자 조직을 강화하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조합 중심으로 연대하고 스스로 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런 힘을 바탕으로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격도 국제시장 수준에 근접하게 맞춰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에게도 신뢰를 줄 수 있고 우리 농산물을 아껴주는 국민에게 제대로 보답할 수 있다. 통상 협상에서 농업이 매번 민감한 쟁점이 되지 않도록 평소에 준비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통상 협상에서 어떤 실익이 있나.
“지금 우리 농업은 내부적으로 여전히 허약한 상태다. 이런 구조로는 쌀과 소고기 같은 민감품목을 두고 공격적인 통상 협상을 벌이기 어렵다. 이번 한미 협상에서는 운 좋게 시간을 벌었지만 다음에도 계속 이렇게 막아낼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농업 구조가 개혁되고 튼튼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설령 외부에서 추가 개방 요구가 들어오더라도 좀 더 유연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농민 반발도 큰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어떤 일도 일방적으로 가능한 시대는 아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농업계, 학계, 연구기관, 생산자 단체, 소비자 대표, 정치권 등이 참여하는 협의 구조가 필요하다. 이런 체계를 통해 논의하고 정부와 협의해 추진해야 한다. 예컨대 네덜란드나 덴마크 같은 나라들은 농업 기관과 농업 대학의 통폐합을 통해 세계 최고의 농업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네덜란드는 기업농이 아니라 가족농 중심이다. 가족농이 조합으로 묶여있고, 이 조합이 연구기관과 긴밀하게 협의하며 지속적인 혁신을 추진한다. 정부 정책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우리 농민들은 매우 우수하다. 우리 자신을 믿고 구조 개혁에 나서야 한다.”
“고령 농민 대상으로 한 은퇴 제도 도입해야”
민주당이 추진 중인 농안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당내 반발은 없었나.
“다른 의견을 냈다고 해서 공개 비판하거나 압력을 행사한 일은 없었다. 이미 당내에서 논의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흐름을 중간에 멈추거나 다른 입장을 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감 표시를 하는 일도 쉽지는 않겠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혼자만은 아니라고 본다.”
농안법을 반대한 핵심 이유는.
“세계적으로 농산물 가격을 지지해 농민 소득을 보장하는 정책은 실패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농업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한 나라가 딱 두 나라 있는데, 바로 한국과 일본이다. 두 나라 모두 ‘가격 지지’(농산물 가격이 떨어졌을 때 정부가 개입해 일정 가격을 보장해 주는 제도)를 통한 소득 보장 정책을 폈고 오랫동안 예산을 집중해 썼다. 이런 정책은 일본 자민당이 농촌 지역 과다대표 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것과 연관이 깊고 세습정치로 이어진다. 자민당은 잘되었을지 모르나 일본 농업의 체질은 결코 개선되지 못했다.”
가격 지지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원인은 ‘소농 구조’에 있다. 한일은 농가당 경작 면적이 매우 작다. 기계농업을 하기엔 토지 여건이 열악하고, 필지들도 잘게 쪼개져 있다. 생산물이 적으니 소득이 낮고 결국 가격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선진국은 반대로 필지 규모를 키우고 토지 조건을 개선하면서 경쟁력을 높여왔다. 덴마크, 네덜란드, 이스라엘 모두 우리보다 땅이 넓지 않다. 덴마크는 경상도만 하고, 네덜란드도 축산 강국이지만 면적은 작다. 땅 크기보다 정책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고령 농민은 떠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농촌에 은퇴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많은 고령 농민이 이제는 농사를 그만 짓고 싶어 한다. 농지를 자발적으로 내놓을 수 있도록 연금이나 은퇴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 그래야 청년들이 진입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지금처럼 1.5헥타르 규모의 소작 구조를 유지하면 청년들은 들어올 수 없다. 소작농으로 평생 살아야 하는데 누가 하겠나. 청년농 유입을 위해선 스마트팜 같은 첨단산업에도 길을 열어줘야 하고, 무엇보다 농지를 ‘경작자가 소유’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현재 농지의 절반을 비농민이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농민이 농사를 지어도 임차농, 소작농이 된다. 외국은 농지 소유를 매우 엄격하게 규제한다. 우리처럼 누구나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