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보이스피싱 범죄는 다른 나라와 좀 다르다. ‘기관 사칭형’ 범죄가 유독 많다.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거나, 개인정보가 도용됐으니 빨리 조치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정부기관을 사칭하는 범죄가 많다 보니 피해액도 크다. 모든 계좌의 돈을 한 곳으로 모으라는 황당한 요구를 해도 정부기관의 말이니 따르는 피해자들이 꽤 생긴다. 실제로 우리나라 보이스피싱 범죄의 건당 피해금액은 5000만원을 넘는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지 않으면 정부가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하다. 정부의 행정과 서비스가 불친절하고, 위압적이며, 그래서 국민은 각자도생만이 살길인 경우를 자주 당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의 요구가 쉽게 먹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집을 팔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연락해 신고해야 한다. 그래야 집이 없다는 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파악하고, 건보료에서 주택 소유에 따른 보험료를 빼준다. 당사자가 가만히 있으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그 사실을 스스로 파악해 보험료를 조정하는 데 최장 1년이 걸린다. 1년 동안 건강보험료를 괜히 더 많이 내야 하는 셈이다.
집을 누가, 언제, 얼마에 사고팔았는지는 대법원 등기소에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돼있다. 시간이 흐르면 국민건강보험도 내가 집을 언제 팔았는지 알 수 있고, 그러면 집을 판 줄 몰라서 다소 과도하게 부과한 건보료는 당연히 정산해 돌려주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게 안 된다. 개인이 그 사실을 건보공단에 역시 신고하고 환급신청을 해야 하며, 그조차도 3년이 지나면 안 된다.
저소득층에 제공되는 각종 복지수당이나 혜택도 당사자가 신청하지 않으면 정부가 알아서 보내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장 가난한 국민에게 지급되는 기초생활보장급여도 개인이 신청해야 받을 수 있다. 전 국민의 소득을 국가가 이미 다 파악하고 있고, 은행마다 개인들의 주거래 계좌가 다 있기 마련이니 찾아서 주려고 하면 못 할 일도 아니지만, 행정 부담을 이유로 각자 알아서 신청해야 받을 수 있게 돼있다.
장애수당과 장애인연금, 아동수당, 양육수당 등도 마찬가지다. 신청하지 못해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나중에 알게 돼도 못 받은 기간을 소급해 지급하지는 않는다. 국가와 지자체, 공무원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개인에게 벌어진 불행이나 사고는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 해결되는 게 하나둘이 아닌 것이다.
정부가 가끔씩 내놓는 대출 규제도 ‘당장 내일부터’ 시행되는 바람에 은행에서 빌리기로 했던 돈이 갑자기 끊기고, 각자 알아서 돈을 구해야 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걸 바라보는 이웃들도 그런 정부의 결정에 항의하기보다는 당사자의 운이 없음을 위로하거나 심지어는 속으로 고소해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전 국민의 1%도 안 되는데 왜 신경을 쓰느냐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도 되는 사회다.
이렇다 보니 각자도생은 모든 개인의 상식이 된다. 어느 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당신의 개인정보나 계좌가 범죄에 악용돼 피해자가 많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 것이다.
올해 4월까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8268건으로 1년 전보다 22% 늘어났다. 전체 피해액 역시 2.2배나 증가했다. 1인당 피해액은 5301만원으로 전년 동기의 2813만원에 비해 두 배가량으로 커졌다. 은행이나 공공기관은 전화로 비밀번호를 묻지 않으니 속지 마시라는 정도의 홍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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