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매수 종료 일주일 만에 유증 발표…시장 비판 쏟아져
계획 철회에도 신뢰 잃고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불명예도
올해 재계의 가장 큰 화두는 경영권 분쟁이었다. 이 중에서도 고려아연이 연중 이목을 끌고 있다. 고려아연은 영풍그룹을 공동 창업한 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함께 운영해온 알짜 회사였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타오르다 지난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75년 동업’ 파국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의 참전으로 ‘공개매수 전쟁’이 시작됐다. 현재 MBK·영풍의 지분율이 다소 앞선 가운데, 내년 1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최후의 승자가 가려질 전망이다. 조용하던 고려아연은 왜 분열을 시작했고, 그 배경엔 어떤 얘기가 숨겨져 있으며, 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장면과 현재 진행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편집자주]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은 영풍은 9월13일 주당 66만원에 공개매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개매수 청약이 시작되면서 주가가 치솟자 MBK·영풍은 9월26일 공개매수가를 75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고려아연도 대항 공개매수에 나섰다. 10월2일 주당 83만원에 자사주 공개매수를 선언한 것이다. 이에 발맞춰 MBK·영풍도 똑같이 공개매수가를 83만원으로 올렸다.
과열 양상을 보이자 금융감독원은 공개매수 관련 불공정거래 조사에 착수했다. 이에 MBK·영풍은 더 이상 공개매수가 추가 인상은 없다고 밝혔다. 반면 고려아연은 10월11일 종전 83만원에서 89만원으로 또 한 번 가격을 올리며 승부수를 띄웠다. 한 달가량 지속된 MBK·영풍과 고려아연의 공개매수는 각각 10월14일, 10월23일 종료되며 ‘쩐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공개매수 위해 빌린 돈 주주가 갚느냐는 비판 쇄도
폭풍 같았던 공개매수가 종료되며 숨고르기에 들어가나 했던 경영권 분쟁은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발표로 재차 요동쳤다. 고려아연은 10월30일 자사주 소각 후 발행주식 전체의 20%에 육박하는 보통주 373만2650주를 주당 67만원에 일반 공모 형태로 신규 발행하겠다고 밝혔다. 유증 목적에 대해선 “소액주주, 기관투자자, 일반 국민 등 다양한 투자자가 주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적대적 인수합병(M&A)로 인한 국내 산업생태계 교란과 공급망에 대한 부작용도 최소화하겠다”라고 설명했다. 유증을 통해 조달할 금액은 2조5000억원으로, 이 가운데 2조3000억원이 차입금 상황 목적에 쓰인다고 고려아연은 공시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유증 발표 당일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로 급전직하했다. 전 거래일 대비 46만2000원(29.94%) 하락하며 108만1000원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시장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주주가치를 제고하겠다며 시작한 공개매수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정반대 성격의 유증을 발표했던 탓이다. 자사주 공개매수가(89만원)보다 유상증자 예상 발행가격(67만원)도 한참 낮았다.
통상적으로 유증은 주식 수가 늘어나 기존 주주들의 지분가치가 희석된다. 기존 주주들 입장에선 악재다. 아울러 경영권 분쟁에서 지분율 우위를 점하기 위한 자사주 공개매수를 위해 비싸게 빌린 돈을 주주가 대신 갚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금융당국도 제동을 걸었다. 금감원은 유증 발표 이튿날 브리핑을 통해 “고려아연이 자사주 매입을 통한 공개매수, 소각 계획, 유상증자 등 모두 이미 계획해 순차적으로 진행만 시킨 것이라면 신고서에 중대한 사안이 빠진 것”이라며 “부정거래 소지가 다분해 이를 감안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공개매수와 유증을 도운 미래에셋증권과 KB증권에 대한 검사도 착수했다. 시장의 비판과 당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결국 고려아연은 11월13일 유증 계획을 철회했다.
당국 비판에 거래소 제재까지…유증 후폭풍
시장에선 고려아연 유증 시도가 경영권 분쟁의 판도를 바꿨다고 지적한다. 당초 영풍이 사모펀드와 손을 잡은 데 대한 반대 여론이 거셌다. 기술 유출은 물론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고려아연이 해외기업에 헐값에 매각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주와 시장의 신뢰를 저버리는 유증 시도 이후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분쟁 명분이 크게 사라졌다는 시선이 고개를 들었다.
당국도 유증 방침을 꼬집기도 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12월2일 “고려아연 사례는 차입해서 자사주를 산 뒤 유상증자하는 과정에서 주주들은 물론 회사도 피해를 볼 수 있었다”며 “고려아연이 유상증자를 철회한 이유는 결국 소액주주의 반발 등도 고려했겠지만 현행법상 우려도 반영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고려아연은 제재를 받게 됐다. 12월11일 한국거래소는 유증 결정을 철회한 고려아연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하고 벌점 7.5점과 제재금 6500만원을 부과한다고 공시했다. 고려아연이 영풍·MBK 연합과의 경영권 분쟁 소송 과정에서 정정사실이 발생한 사실을 늦게 공시하고(공시불이행), 유상증자 결정을 번복한 것(공시번복)에 대한 조치였다.
1990년 상장한 고려아연은 35년 간 단 한 번도 불성실공시법인에 지정된 적이 없었다. 거래소 공시요구도 단 한 건 없었다. 하지만 올해 4월 영풍으로부터 제기 당한 소송을 지연 공시했다는 이유로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을 받은 데 이어 유증 시도와 철회로 또 제재를 받았다. 조용하지만 강한 기업의 명예가 실추된 2024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