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의 성공 키워드는 ‘2루타’…이치로는 내야안타가 많아
메이저리그에선 장타 못 치면 좋은 평가 받을 수 없어
스즈키 이치로는 동양인으로서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이치로는 일본에서 9시즌을 뛰고 진출한 탓에 만 27세가 넘어 데뷔했다. 하지만 44세 시즌까지 롱런하며 역대 24위에 해당하는 통산 3089개 안타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155년 역사에서 3000안타를 달성한 33명 중 이치로의 데뷔가 가장 늦었다.
3할 타율, 200안타, 골드글러브 수상을 10년 연속으로 달성한 게 역대 최초였던 이치로는 99.7%의 압도적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이었고, 394명 중 단 한 명이 표를 주지 않아 마리아노 리베라에 이은 역대 두 번째 만장일치 입성이 무산됐다. 이치로(51)는 이정후(26)의 우상이다. 이정후는 우타자인 아버지보다는 좌타자인 이치로를 롤모델로 삼았다. 이정후는 이치로의 등번호인 51번을 키움 히어로즈에서 달았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도 같은 번호를 달고 있다.
이정후의 목표는 강한 타구로 내야를 뚫어내는 것
이치로는 동시대 수비를 가장 잘하는 우익수였고, 통산 도루가 509개일 정도로 주루도 뛰어났다. 하지만 이치로의 공격력에 대해서는 최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치로는 38세 시즌까지의 ‘조정 OPS’가 113으로, 추신수가 37세 시즌까지 기록한 122보다 떨어진다. 조정 OPS는 출루율과 장타율을 더한 OPS에 구장과 시대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신뢰도가 매우 높은 공격 평가라 할 수 있다. 이치로가 200안타 시즌을 10번이나 달성했음에도 추신수보다 낮은 이유는 볼넷을 많이 얻는 추신수(0.377)보다 출루율(0.355)이 낮았고, 무엇보다 장타를 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신수의 장타 비중은 안타의 35%인 반면, 이치로는 19%였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장타를 치지 못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이정후도 지난해 장타 비중이 16%에 그쳤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진출에 앞서 ‘축소 지향’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치로는 일본에서 20홈런 시즌이 두 번이었을 정도로 장타력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서 했던 대로 하면 메이저리그 투수의 공을 칠 수 없다고 판단해, 특유의 진자 타법을 수정했다. 홈런 하나를 2루타 두 개로, 2루타 하나를 단타 두 개로 대신하는 전략이었다.
수비 시프트가 없었던 그 당시에는 이치로의 전략이 통할 수 있었다. 이치로 시대에는 공에 방망이를 가져다대 내야 타구를 만들고 1루로 빠르게 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타구가 자주 가는 곳을 분석해 수비수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지금은 이런 안타 생산이 불가능하다. 이치로는 내야안타 비중이 12%를 넘었지만, 지난해 메이저리그 평균은 6%였다.
이치로는 최고 수준의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야안타 생산에 유리했다. 이정후의 스피드는 평균 이상으로 평가받지만, 이치로 수준은 아니다. 따라서 이정후의 전략은 이치로와 달라야 한다. 이치로가 우상이지만, 그렇다고 이정후의 지향점은 아니다. 매년 팀을 바꾸며 3년 연속 타격왕을 한 루이스 아라에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방망이에 가볍게 맞혀 내야수 키를 살짝 넘는 ‘이치로식 안타’ 생산에 특화됐다면, 이정후의 목표는 강한 타구로 내야를 뚫어내는 것이다.
지난해 이정후는 강한 타구를 치기 위해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타격을 했다. 하지만 이정후의 타구는 강하면 강할수록 오른쪽으로 가는 땅볼이 됐고, 대부분이 2루수와 1루수에게 잡혔다. 아무리 빠른 타구도 뜨지 않으면 내야수에게 걸린다. 상대 내야수들은 분석을 통해 이정후의 타구가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김현수에게 일어났던 일로, 팬들은 ‘김현수 시즌 2’가 될까 걱정했다.
두 번째 문제는 소극적인 타격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정후의 콘택트 능력을 높게 평가했고, 1번을 맡겼다. 하지만 헛스윙을 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과 출루에 대한 부담감을 가진 이정후는 삼진을 적게 당하는 대신 좋은 공을 놓치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대한 구단의 처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출루에 대한 부담을 덜고 더 적극적으로 칠 수 있도록 3번으로 옮겨준 것이었다. 타점을 올려야 하는 3번은 전통적으로 장타자들이 위치하는 자리지만, 이정후는 KBO리그에서도 정확한 타격으로 타점을 올리는 3번 타자였다.
타순, 1번에서 3번으로…출루보다는 장타에 집중
구단의 두 번째 처방은 ‘너무 앞에서 치지 말 것’이었다. 공은 앞에서 맞을수록 더 멀리 날아간다.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처럼 공을 몸에 붙여놓고 장타를 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공을 앞에서 치면 칠수록 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홈런 타자들이 삼진을 많이 당하는 이유다.
샌프란시스코 팻 버렐 타격코치는 이정후의 스윙이 짧고 간결하기 때문에 더 시간을 가지고 쳐도 충분하다는 조언을 했다. 아버지인 이종범 코치(KT 위즈) 또한 타석마다 강하게 치려고 하지 말고, 반대편으로 가볍게 칠 수 있는 타격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이정후는 이 조언들을 곧바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어깨 수술 이후 몸을 더 단단하게 만들면서, 히팅 포인트를 뒤로 약간 옮기는 타격 조정을 끝낸 이정후는 지난해보다 더 강한 타구를 만들고 있으면서도 방향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강한 타구가 아니더라도 유격수 키를 넘기는 안타가 나오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지난해엔 없었던 좌중간과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가 나오고 있다. 야구팬들이 ‘갈라쇼’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정후표 타구’는 KBO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낸 비결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7년을 뛰는 동안 친 홈런이 65개인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서 매년 15개 이상의 홈런을 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이정후는 이치로처럼 많은 안타를 생산하면서도 40개 이상을 2루타로 만들면, 전통적이지는 않지만 득점권에서 적시타를 때려내는 3번 타자가 될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이정후의 키워드는 2루타이고, 성공의 열쇠는 2루타 1위가 되는 것이다.
이정후와 계약한 파르한 자이디 사장이 해임되고 버스터 포지가 신임 사장을 맡은 샌프란시스코는 올 시즌 기대 이상의 출발을 하고 있다. 팀의 레전드이자 세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포수였고, 선수 때부터 명석하기로 소문난 포지는 겨울에 선수 영입을 많이 하지 않았다. 기존 선수들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정후도 포지가 말한 더 잘할 수 있는 기존 선수였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한국 선수들은 ‘선배’를 잘 만나야 한다. 김현수와 박병호는 강정호 덕분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정후는 김하성 덕분에 큰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이정후의 활약은 향후 메이저리그를 노리는 한국 타자들에게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