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행, ‘대통령 몫’ 재판관 지명 파장…“선출될 대통령 권한 뺏은 중대 위헌”
헌법소원·가처분 잇달아…‘진보 2명 퇴임→보수 2명 임명’ 현실화하면 구성 변화
이완규 지명에 ‘尹心’ 작동 분석…李 “헌법질서 구현에 일조” 사퇴 요구 일축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역사적 심판을 매듭지은 헌법재판소가 다시 정국의 중심에 섰다. 윤 전 대통령 파면 닷새 만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 헌재 재판관 2인을 기습 지명하면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반헌법적 월권이라는 비판 속에 재판관들은 정국의 향방과 헌재의 구도를 결정하는 ‘키’를 쥐게 됐다.
한 대행의 ‘대통령 몫’ 헌재 재판관 후보자 지명은 그야말로 기습적이었다. 4월18일 문형배 헌재소장 대행과 이미선 재판관이 동반 퇴임하고 새 정부 출범 때까지 헌재는 마은혁 재판관 합류 여부에 따라 ‘7인’ 또는 ‘6인’ 체제로 유지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한 대행은 이 예상을 깨고 4월9일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후보자로 지명하고, 보류를 거듭했던 국회 몫의 마 재판관을 임명했다.
전례 없는 기습 지명…9인 체제 ‘1호 사건’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의 헌재 재판관 후보자를 지명한 것은 헌정사 초유의 일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권한대행의 역할은 현상 유지 차원의 소극적 행사로 국한돼야 한다는 것이 헌법학자를 비롯한 학계와 법조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한 대행은 헌법기관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로 보폭을 확대했다.
한 대행은 ‘전례’를 참고해 고뇌 속 결단을 내렸다고 했지만, 유일한 사례인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때 전개된 상황과는 정반대다. 2017년 박 전 대통령 파면으로 권한대행이 된 황교안 전 총리는 당시 대통령 몫인 박한철 전 헌재소장의 후임을 지명하지 않았다. 황 전 총리는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는 법제처·국회입법조사처의 유권해석과 여야 합의를 고려해 대법원장이 추천한 재판관만 임명했다. 최근에도 국회입법조사처는 우원식 국회의장에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은 위헌·위법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절대다수 의견’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법학교수회는 이완규·함상훈 후보자 지명을 규탄하는 긴급 성명을 내고 “한 권한대행의 헌재 재판관 후보자 지명은 미래에 선출될 대통령의 권한을 선제적으로 잠탈(몰래 잠식해 차지)하는 것으로서 중대한 위헌 행위에 해당함이 명백하다”며 지명 철회를 촉구했다.
한 대행의 기습 지명이 가능했던 것은 헌법 제71조에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나 한계 기간, 판단 주체 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다.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고’나 사망·사임·파면으로 ‘궐위’ 상태가 되면 국가의 연속성과 안정을 위해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되지만, 이행 기준이나 통제 수단, 세부적인 절차·방식 등은 정해 놓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한 대행의 결정에 정반대 해석을 내놓으며 충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대행의 대통령 몫 재판관 임명 시도가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결국 헌재의 손으로 넘어갔다. 4월11일 기준 헌재에는 시민사회계와 법조인들의 헌법소원 및 가처분 신청이 동시다발적으로 접수된 상태다. 마 재판관 합류로 6개월 만에 ‘9인 완전체’를 이룬 헌재의 ‘1호 심리’ 사건이 된다. 무작위 전자배당을 통해 마 재판관이 주심을 맡게 됐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12·3 비상계엄에 대한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낸 당사자 3명을 대리해 한 대행의 이완규·함상훈 후보자 지명 행위가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본안 결정 때까지 인사청문요청안 제출 등 지명 행위의 효력을 멈춰달라는 가처분도 신청했다. 법무법인 덕수와 김정환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도 동일한 취지의 헌법소원과 가처분을 각각 제기했다. 이들은 한 대행의 위헌적 행위로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27조1항의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입장이다.
김 변호사는 “한 대행에 대한 탄핵심판에서 헌재는 대통령과 대통령 권한대행의 민주적 정당성에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승계가 아닌 대행’으로서의 지위라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며 “대통령 몫 헌재 재판관 후보자 지명·임명은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통령이 갖는 헌법상 고유권한으로, 권한대행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만일 헌재 재판관 9인 중 과반수(5인 이상) 찬성으로 가처분을 인용하면 본안인 헌법소원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 대행의 지명 효력은 정지되고 절차 역시 모두 중단된다. 문 대행과 이 재판관 퇴임 전까지 가처분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정치적 파장이 큰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헌재의 장고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헌재 지각변동 일어나나…치열한 수싸움 전망
이완규·함상훈 후보자 임명 절차는 결국 ‘시간 싸움’이다. 헌법소원·가처분 진행과 별개로 우원식 국회의장은 대선 때까지 최대한 ‘시간 벌기’에 돌입한다는 방침이다. 우 의장은 두 후보자에 대한 정부의 인사청문회 요청 접수 거부 방침을 밝혔다. 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고 효력정지 가처분도 동시에 신청할 방침이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가 한시라도 빨리 권한쟁의심판 및 가처분을 제기해 최대한 이른 시간에 헌재의 결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인사청문 절차는 국민 알권리 보장과 적법 절차를 통한 임명권의 정당성 확보, 권력분립 원칙 아래 인사권자의 인사권한 남용 방지를 목적으로 한다”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임명권자가 적법한 권한을 갖춰야 하는데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제도를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국회의 인사청문 권한을 침해한 것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국회의장은 청문요청서 접수를 거부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정부의 발송 자체로 절차 개시가 이뤄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한 대행이 임명을 강행한다면 헌재의 가처분 인용 결정 및 본안 판단이 나올 때까지 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없다. 특히 두 후보자는 국회 동의 없이도 임명이 가능하다. 인사청문회법상 대통령이 임명 동의안을 내면 국회는 20일 안에 인사청문 절차를 마쳐야 하며 청문 기간은 10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이 기간이 지나도 국회가 인사청문 보고서를 채택·송부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인사청문 요청 접수일로부터 21일이 되는 시점부터는 언제든 한 대행의 임명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한 대행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서는 헌재의 구도 재편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7인 심리정족수’ 기준은 마은혁 재판관 임명만으로도 채울 수 있고,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권한 행사는 자제해야 한다”던 불과 100일 전 발언을 스스로 뒤집어야 할 만큼 급박하게 움직여야 할 다른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철저한 검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이완규 후보자를 지명했다는 점에서 ‘윤심(尹心)’이 작동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내란 혐의로 고발된 이 후보자가 기소되면 ‘피의자’를 넘어 ‘피고인 헌재 재판관’이라는 전무후무한 혼돈이 불가피한데 한 대행이 여러 논란을 예상하고도 ‘무리수’를 둔 데에는 차기 정부를 겨냥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한 대행이 재판관 임명을 마무리하면 헌재는 진보 성향 2명(정계선·마은혁), 중도 2명(김형두·정정미), 보수 5명(정형식·조한창·김복형·이완규·함상훈) 구도가 된다. 진보 성향인 문형배·이미선의 퇴장과 보수 성향의 이완규·함상훈의 등판으로 헌재 내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셈이다. 탄핵심판 등에서 ‘인용’ 결정을 위한 6표 확보도 보수 우위 구성에서 이뤄지게 된다. 차기 정부에서 줄탄핵과 권한쟁의심판 등 헌재에서 벌어질 ‘혈투’의 공수가 바뀔 수 있다. 권한쟁의심판은 탄핵심판과 달리 ‘과반 이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행정부나 입법부의 정책 추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대통령 몫으로 지명 가능한 헌재 재판관 3명 중 정형식 재판관은 2023년 12월 취임했다. 재판관 임기는 6년이기 때문에 헌재에서 두 후보자에 대한 인사 절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 결국 임명되면 차기 대통령은 임기 막바지에 정 재판관 후임으로 1인을 지명하게 된다.
파면된 대통령의 측근이자 내란 피의자인 이 후보자는 “헌법 질서가 구현되는 일에 일조하고 싶다”며 자진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수사 받는 상황에 대해서도 “절대 기소될 사안이 아니”라며, 만일 기소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는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