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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사장 인선 지연 장기화…낙하산 인사 논란에 노조 반발
인수 후보로 한화·현대차·LIG·한진 거론…지역 반발·독점 우려도

지난해 국내 방산 업계가 사상 최대 수주 잔고를 쌓았지만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방산 ‘빅4’ 가운데 유일하게 실적이 뒷걸음질했다. 후임 사장 인선 지연으로 경영 공백이 길어지며 KF-21 양산, FA-50 수출 등 핵심 사업 일정도 흔들리고 있다.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된 낙하산 인사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자 내부에서는 차라리 민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분위기다. 다만 인수 후보들의 이해관계, 독점·지역경제 관계가 얽힌 만큼 방향보다 중요한 건 속도와 지배구조의 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KAI의 지난해 매출은 3조6337억원, 영업이익은 2407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4.9%, 2.8% 감소했다. 같은 기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영업이익은 3배 이상 뛰었고, 현대로템과 LIG넥스원도 매출·수익성이 대폭 개선됐다. 방산 빅4 중 KAI만 역성장이다. 수주 잔고는 사상 최대지만, 실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셈이다.

업계는 실적 정체의 배경으로 잦은 리더십 교체와 공기업에 가까운 지배구조를 꼽는다. 정권 교체 때마다 전략이 바뀌고 의사결정이 지연됐다. 결국 대형 수주를 이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속도를 잃었다는 지적이다. 수주 잔고를 실적으로 전환하려면 원가·납기·사후지원까지 전 주기 관리가 필요한데, 지연된 투자 결정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다.

2022년 7월8일 경남 사천시 한국항공우주산업 (KAI)에서 지상 테스트를 시작한 차세대 한국형 전투기 KF21 1호기가 활주로와 이어진 램프 구간을 활주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22년 7월8일 경남 사천시 한국항공우주산업 (KAI)에서 지상 테스트를 시작한 차세대 한국형 전투기 KF21 1호기가 활주로와 이어진 램프 구간을 활주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내부에서도 “이럴 바엔 민영화하라” 목소리

강구영 전 사장이 지난 7월 조기 퇴임한 뒤 두 달째 직무대행 체제가 이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리더십 공백 속에 KF-21 양산 준비, FA-50 추가 수출 협상, 수리온,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등 굵직한 프로젝트가 줄줄이 늦춰지고 있다. 2분기 매출 감소 역시 방산 수출계약 지연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KAI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 주도로 항공기 사업을 통합하며 출범했다. 최대주주는 한국수출입은행(26.41%), 2대 주주는 국민연금(약 9%)이다. 출범 이후 8명의 사장이 거쳐갔지만, 내부 승진은 1건에 그쳤다. 임기 중 교체와 줄 세우기식 보직 이동이 반복되며 전략의 일관성이 훼손됐다. 일부는 비리 수사로 낙마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KAI 민영화는 구조적 불신을 끊을 수 있는 해법으로 재부상했다.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낙하산 인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KAI 내부 인식도 바뀌었다. 과거 70~80%였던 민영화 반대 여론은 약화되고, 최근에는 찬성률이 55%까지 올라섰다는 내부 조사 결과가 전해진다. 출범 26년 차에 접어든 만큼 내부 승진 트랙을 제도화하고, 기술·영업 책임을 분리한 운영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KAI 노조는 8월26일 성명을 내고 “차기 사장 인선 제자리걸음으로 회사와 국가 전략산업에 공백과 혼란이 확대되고 있다”며 조속한 인선을 촉구했다. 노조는 류광수 전 KAI 부사장과 강은호 전 방위사업청장을 ‘반대’ 후보로 지목했다. 노조는 류 전 부사장에 대해선 퇴직 후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이직한 뒤 KAI 출신 핵심 기술인력 이탈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강 전 청장에 대해서도 과거 업무추진비 허위 기재 의혹과 술자리 논란으로 고발됐던 보도를 거론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두 인사가 최종 후보군에 오를 경우 총력 투쟁에 나서겠다는 것이 노조 입장이다.

민영화를 주장하는 쪽은 크게 세 가지를 근거로 든다. 첫째, 글로벌 경쟁에서 의사결정 속도와 책임경영이 필수라는 점. 둘째, ‘올드 스페이스’(정부 주도)에서 ‘뉴 스페이스’(민간 주도)로의 전환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항공우주 시장은 2022년 약 445조원에서 2032년 940조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지만 한국 점유율은 1% 수준에 머무른다. 군용 중심을 민수 항공·위성·드론 등으로 넓혀야 한다는 과제가 KAI 앞에 놓여있는 만큼 지배구조 전환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민영화론자들은 “세계 톱티어와의 격차를 줄이려면 대형 프로그램을 동시다발로 수행할 자본·인력 풀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최대주주인 수출입은행도 지분 매각을 통해 ‘자기자본 확충→수출금융 재원 확보’의 선순환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대우조선해양이 한화그룹에 매각된 이후 한화오션으로 재출범하면서 저가 수주를 줄이고 수익성 중심의 선별 수주로 체질을 바꾼 사례를 준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직문화와 글로벌 확장 전략이 함께 바뀌었다는 평가다. 소유 전환이 곧 경영 시스템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는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며 민간 중심의 책임경영 체제로 전환된 이후 저가 수주 관행이 사라지고, 수익성과 기술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선별적 수주 전략이 정착됐다”면서 “민영화가 단순한 소유권 이전을 넘어 기업 체질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반대 측 논리도 뚜렷하다. 특정 대기업이 KAI까지 품으면 방산 생태계가 과점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민간 방산기업이 되면 단기 실적 압박 탓에 장기적인 연구개발(R&D) 활동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아울러 경남 사천에 본사를 둔 KAI가 민영화 과정에서 본사 이전이나 구조조정을 겪는다면 지역 반발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민영화가 단기적으로는 혁신을 이끌 수 있지만, 신뢰를 해칠 수도 있다는 경고다.

경남 사천시 KAI 본관에 설치된 T-50 모형 ⓒ연합뉴스
경남 사천시 KAI 본관에 설치된 T-50 모형 ⓒ연합뉴스

한화·현대·LIG·한진 등 인수 후보 거론

시장에선 ‘한화–LIG’ 2파전 구도가 부각되는 가운데 현대차그룹과 한진그룹은 관망 속에서 선택지를 넓히는 분위기다. 한화그룹은 KAI 매각설이 불거질 때마다 유력 인수 후보로 지목돼 왔다. 특히 한화는 항공엔진·레이더·항공전자·무인기 역량을 보유해 KAI와 결합 시 통합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에 이어 KAI까지 품으면 독점 논란이 불가피하다. 해외 조선·MRO 투자 등 동시 확장에 따른 재원 배분 리스크도 변수다.

시장에선 LIG넥스원을 ‘반(反)한화’ 축의 유력 대안으로 본다. 다만 LIG넥스원은 자금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회사의 지난해 말 기준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372억원에 불과하다. 지난해 발표한 5조원 규모 투자계획을 감안하면 인수 자금 마련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방산 업계 관계자는 “LIG넥스원의 경우 LG그룹 차원의 지원과 외부 조달로 자금을 보완하려는 의지는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실탄이 확보되면 한화와의 ‘2파전’ 구도가 뚜렷해질 것”이라고 했다.

현대차그룹(현대로템·현대위아)은 도심항공교통(UAM)과 모빌리티 전략을 KAI와 결합할 수 있다. 민·군 융합과 글로벌 네트워크는 강점이지만, 방산 정체성이 희석될 수 있고 의사결정이 복잡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무엇보다 한화그룹이나 LIG넥스원에 비해 인수 의지가 강하지 않다는 게 방산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진그룹은 항공 MRO와 민항 네트워크 시너지가 기대된다. 다만 아시아나 인수 이후 재무 부담이 걸림돌이다.

문 교수는 “전략산업이기 때문에 반드시 공공 소유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정부도 민영화를 결단해야 할 때”라며 “그렇게 돼야 민간에서도 인수 의사를 나타낼 수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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