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사실을 들춰내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자 사회적 기능이다 보니, 긍정적인 숫자나 개선되고 있는 지표들은 본의 아니게 종종 놓치게 된다. 그중 하나가 노동소득분배율(피용자보수비율)이다. 경제활동의 최종 결과물인 GDP(국내총생산)에서 노동자들이 가져간 몫의 비율을 의미하는 노동소득분배율은 2000년 58%였다가 2015년경 바닥을 찍고 최근 67%까지 올라왔다. 적어도 최근 10년간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보다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률이 더 높았다는 뜻이다.
연소득이 1억원이 넘는 근로자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4년 52만 명에서 현재 14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여성의 비중은 더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2013년 4만8000명이었던 여성 억대 연봉자는 현재 24만 명을 헤아린다. 여성 억대 연봉자들의 상당수가 ‘맞벌이’일 가능성을 고려하면 연소득 2억원이 넘는 가구가 수십만 곳이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소득 상위 10% 가구의 연평균 소득은 2억1051만원이다.
노동소득분배율이 개선되고 억대 소득의 가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건 정말 긍정적인 신호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노동소득분배율이 높아졌다는 사실이 공정한 부의 배분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산방식이 업그레이드되지 않고 근로자의 노동력 그 자체에만 의존하는 올드한 산업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벌어서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기업을 떠올리면 된다. 그런 기업의 노동소득분배율은 매우 높게 나온다.
노동소득분배율이 제자리걸음이거나 계속 낮아지던 시기에 우리는 그걸 근로자 몫을 기업이 빼앗고 있다고 해석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설비투자가 늘어나면서 생산성 향상이 매우 가파르던 시기여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에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 매출이 늘어나지만 전체 매출에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진다. 노동소득분배율이 지난 10년간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새로운 설비가 도입돼 생산방식의 혁신을 경험한 기업들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 함께 존재한다. 지난 10년간 경제성장률이 계속 낮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노동소득분배율이 올라간다는 건 저성장과 불경기의 신호이기도 하다. 그런 시기에 고소득 근로자들은 빠르게 늘어나면서 지난 10년간 집값은 가파르게 올랐다. 억대 연봉자의 60%가 거주하는 수도권 집값이 더 빠르게 오른 것도 그런 맥락이다.
노동소득분배율이 높아지는 ‘흐뭇하면서도 우울한 저성장’ 탓에 시중 이자율도 낮아지면서 고소득 근로자들의 대출 여력은 커졌다. 이들은 대부분 근로기준법이 충실하게 지켜지는 300인 이상 대기업에 다니는, 정년이 보장되는 신분이다. 노후의 복지를 국가가 대부분 보장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가계부채 비율이 다른 나라들보다 유독 높은 이유도 그래서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고 그들의 몫을 늘리고 동시에 경제성장률도 높이며 집값은 안정시키는 일. 윤리학의 잣대로는 그 모두가 다 옳으며 동시에 추구해야 할 가치지만 경제학이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그 모두를 동시에 이루는 건 불가능하며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안타깝지만 이 중에서 뭘 포기하는 게 가장 현명한지를 결정하는 소심하고 비루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동시에 다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일조차 여전히 버겁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도 이제는 좀 더 복잡하고 소심하며 때로는 우울한 일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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