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전쟁 이후 美에 ‘쏟아지는 투자’, 못 따라오는 美 ‘교육 인프라’
한국 기업들, 현지 인재 양성 나서야…현지화 성공하면 ‘트럼프의 핵심 파트너’
한미 정상회담과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약속을 통해 잘 진행될 것 같던 한미 관계가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대규모 수색과 수백 명에 달하는 구금 사태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ICE 측은 제대로 된 체류 자격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근무하는 것은 위법이며 단속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지만, 우리로선 막대한 투자를 약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 당국이 이렇게 나온다면 대규모 투자를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이번 사태의 핵심에는 미 제조업 및 건설업 노동력 부족이 자리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몇 개월 만에 미 제조 업계는 전례 없는 투자 열풍을 맞고 있다. 관세를 피해 미국 내 제조업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천문학적 규모의 자본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프랑스계 글로벌 은행 소시에테제네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 이후 발표된 투자 규모만 1조4000억 달러에 달하며, 이는 새 일자리 약 20만 개 창출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화 여파…축적된 기술 노하우의 ‘손실’
하지만 이런 장밋빛 전망 뒤에는 깊은 그림자가 있다. 바로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다. 현재 미 제조 업계에는 약 50만 개 일자리가 비어있으며, 4월 기준 내구재 제조업 분야에서만 채용 공고가 된 31만3000개의 자리가 충원되지 못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2033년까지 새 제조업 일자리 380만 개 중 190만 개는 충원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히 노동력 부족 문제를 넘어 미 제조업 부활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지표다.
미 제조업 노동력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급속한 고령화다. 현재 제조업 노동자의 4분의 1이 55세 이상이며, 55~64세 연령층의 이직률이 다른 산업에 비해 현저히 높다. 향후 10년간 예상되는 일자리 공백의 75%가 은퇴로 인한 것인데,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의 대규모 은퇴는 단순히 인력 감소를 넘어 수십 년간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의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팬데믹 초기 제조 업계는 140만 개의 일자리를 잃었고, 많은 근로자가 다른 산업으로 이직했다. 2020년 말까지 57만 개 일자리가 회복되지 못했으며, 이는 제조업 노동력을 10년 전 수준으로 후퇴시켰다. 구조적 변화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현대 제조업은 과거의 단순 조립라인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로봇팔로 가득 찬 현대적 공장에서는 고도의 기술적 역량이 요구된다. 하지만 미 교육 시스템은 이런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기술대학과 직업훈련 기관들은 현대 제조업의 디지털화, 자동화 요구사항에 부응하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제조업 노동력 부족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해결책은 ‘임금 인상’이다. 실제 미 제조 업계는 최근 몇 년간 급여를 대폭 인상했고, 이는 2022년 4월 100만 개가 넘던 채용 공고를 현재 50만 개 수준으로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여기에 근본적 딜레마가 있다. 미국인들이 제조업에 요구하는 높은 임금이 바로 많은 제조업체가 미국을 떠난 이유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성 향상과 함께 임금 경쟁력도 확보해야 하는데, 이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미 트럭운송 업계가 수십 년간 ‘인력 부족’을 호소해 왔지만 실제로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조건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처럼, 제조 업계의 인력난도 구조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24년 미국 싱크탱크 카토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80%는 더 많은 사람이 제조업에 종사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지만, 정작 자신이 공장에서 일하는 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25%에 불과했다.
미국 정치인들에게 제조업 부활은 분명 의미 있는 목표다. 제조업은 연간 2조3000억 달러의 GDP(국내총생산) 기여와 1200만 개의 직접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제의 핵심 축이다. 하지만 과거의 향수에 기댄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각에선 제조업 부활론에 대해 지난 40년간 불평등한 경제 속에서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신기루’라고 비판한다. 실제 제조업 생산량은 증가하고 있지만 고용은 감소 추세다. 트럼프 행정부의 제조업 정책이 성공하려면 관세라는 단편적 도구를 넘어 인력 개발, 교육 혁신, 기술 투자, 지역 개발의 종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노동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제약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투자와 공장이 들어와도 공허한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다. 한마디로 미국 사회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지만 과연 미국이 이런 준비가 되어있는지는 의문이다.
‘생산성-임금’ 동시 상승? 美의 딜레마
트럼프의 제조업 부활 공약이 성공하려면 노동력 관점에서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대규모 직업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트럼프는 최근 ‘100만 명의 새로운 견습생’ 양성 계획을 발표했지만, 구체적 실행 방안은 모호하다. 둘째, 교육 시스템의 근본 개혁이 요구된다. 더 많은 미국인이 제조업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기술대학 장학금 증액, 숙련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비자 확대 등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지역별 격차 해소가 시급하다. 중서부와 남부의 제조업 허브 지역들이 인력난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인프라, 교육 시스템, 인재 파이프라인 개발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 노동 수요를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여건 변화를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적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문화적 적응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 미 노동 문화, 노조와의 관계, 지역사회와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고 적응해야 한다. 현대차와 기아가 남부 지역에서 거둔 성공은 지역사회와의 깊은 유대 관계 구축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참고할 수 있다. 규제 준수와 법무 역량 강화도 신경 써야 한다. 복잡한 노동법, 환경 규제, 산업별 특수 규정들을 이해하고 준수해야 한다. 특히 식품, 의약품, 화학 분야에서는 까다로운 규제들이 넘쳐난다. 공급망 현지화도 고려해야 한다. 단순 조립이 아닌 공급망 변화를 도모하는 미국의 입장을 고려하며 현지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들의 미 제조업 진출은 단순 투자를 넘어 양국 간 상생의 새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첨단 기술과 제조 노하우, 미국의 거대한 시장과 자본이 결합할 때 진정한 제조업 르네상스가 가능하다. 미국의 노동력 부족 문제는 위기이자 기회다. 한국 기업들이 현지 인재 양성, 기술 혁신, 지역사회 기여를 통해 이 도전을 기회로 전환한다면, 트럼프의 제조업 부활 비전의 핵심적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미국이 그런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지 지켜봐야겠지만 전망은 어두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