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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첫 전투지 모슌에서 벌어진 일…마을 이장과 추모공원 건립자 이야기

2년8개월 전, 러시아군은 서쪽 벨라루스를 경유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향해 침공을 감행했다. 키이우 외곽 도시들인 부차, 모슌, 이르핀, 호스토멜 등은 전쟁 최초의 피해 도시로 기록되었다. 그중 모슌은 도시를 완전히 재건하지 않은 채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보존 및 전시하고 있다. 10월26일 모슌의 이장 바딤 제르데츠키와 모슌 추모공원 건립자 라리사 파블로브나 롤라쉬빌리를 만났다. 바딤에게 그날의 기억을 들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침략군과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던 모슌마을의 전사자 추모공원. 사진은 전투 당시 아들을 잃은 라리사이며 뒤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윤경숙 제공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침략군과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던 모슌마을의 전사자 추모공원. 사진은 전투 당시 아들을 잃은 라리사이며 뒤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윤경숙 제공

아들 잃은 라리사 “평화, 하루아침에 깨질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전차와 포격 소리가 들리더니 집 마당에 포탄이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손녀를 안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왔고 한순간에 폭격으로 집이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조용한 마을에 러시아군이 들이닥쳤다. 외곽 도시인 모슌이 뚫리면 수도 키이우로 러시아군이 그대로 진격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아직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알릴 시간도 벌어야 했다. 전차의 진입을 막느라 아이, 여자,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뛰쳐나와 참호를 파고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인간띠를 만들어 장갑차에 맞섰다.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다.”

라리사 역시 이때 아들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지나가고 나서 아들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숲의 토사에 묻힌 유해는 50여 일이 지나서야 찾을 수 있었다. “시신을 보자마자 통곡했다. 왜 어제까지 평화로웠던 이 나라에 쳐들어온 건지, 왜 전쟁이 일어나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추모공원에서 묵념 중인 필자 일행. 맨 왼쪽이 모슌마을의 이장 바딤이다. ⓒ윤경숙 제공
추모공원에서 묵념 중인 필자 일행. 맨 왼쪽이 모슌마을의 이장 바딤이다. ⓒ윤경숙 제공

혼란이 잠잠해진 뒤, 피란길에서 돌아온 그녀는 마을 숲에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추모공원에는 엄폐물이 될 숲을 태워 없애기 위해 러시아가 숲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들은 가지 하나 없이 흑빛 기둥만 남아있었고, 모슌 전투 첫 전사자로 기록된 안토뉴크 안톤 대위가 폭격당한 지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만들었던 참호도 남아있었다.

그녀가 사비를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라리사는 “이 참상을 잘 모르는 후손들과 외지인들에게 알리고 비극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조성했다.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언제 또 이 마을이 러시아군의 군화와 포격에 짓밟힐지 모른다. 현재 집을 복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간이 움막을 지어 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추모공원을 찾았다. 이번에 머나먼 한국에서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하자는 의미로 찾아와준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 한국 역시 6·25의 비극을 겪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강대국과의 동맹에 따라 오랜 대치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언제 하루아침에 평화가 깨질지 모르는 법이다. 김정은의 나라는 언제라도 윤석열의 대한민국을 침공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우리 전쟁에까지 개입하고 있다. 우리도 하루아침에 전쟁이 날지 몰랐다.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김대홍 슬기로운여성행동 간사
김대홍 슬기로운여성행동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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