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대신 ‘경제’로 프레임 전환 시도…‘MB 모델’ 좇는 李의 변심
‘갈팡질팡’ 간판 정책 기본사회 노선…野 일각도 “진정성 의심” 비판
‘지지율 정체’ 속 ‘사법 리스크’ 의식해 무리한 ‘급변침’ 분석도 제기돼
벼랑 끝 위기 속 승부수. ‘사법 시계’는 점점 다가오고, ‘12·3 비상계엄’ 후 두 달이 지나도록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바람이 불지 않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과감한 우회전을 시도하는 모습이다. 사법 리스크 속에 당 안팎의 견제가 점점 거칠어지자 조기 대선 정국과 맞물려 이 대표 입에서는 ‘경제’와 ‘성장’이 언급되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진보의 이념도, 민주당의 색(色)도 등질 수 있다는 각오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재명의 승부수’다. 대선 캐스팅보터인 이른바 ‘산토끼’(무당층·중도 유권자) 표심을 잡아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시도로 읽힌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을 넘어, ‘이재명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①정책적 충돌(이재명표 ‘기본사회 시리즈’와 ‘경제 성장’이 양립할 수 있는지) ②정체성 논란(민주당의 가치를 더 중시하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③정치적 꼼수 논란(이 같은 메시지가 왜 당 지지율이 정체되고 자신의 공직선거법 2심 판결을 앞둔 ‘지금’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등 크게 3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이 대표가 이와 같은 ‘우클릭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하면 조기 대선이 현실화돼도 대권을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 성장→부의 재분배’…李의 변심인가 승부수인가
“경제를 살리는 데 이념이 무슨 소용입니까, 민생 살리는 데 색깔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재명 대표는 2월10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진보 정책이든 보수 정책이든 유용한 처방이라면 총동원하자”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함께 잘사는 세상을 위해서 유용하다면 어떤 정책도 수용하겠다”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먹사니즘’을 포함하여 모두가 함께 잘사는 ‘잘사니즘’을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날 이 대표가 무엇을 가장 강조했는지는 ‘숫자’로 드러난다. ‘회복과 성장’을 주제로 44분간 발언한 이 대표는 ‘성장’이란 단어만 28번 언급했다. 뒤이어 많이 나온 단어는 ‘인공지능(AI·17번)’과 ‘경제’(15번)였다. 이 같은 이 대표의 연설에 민주당 의원들은 28번 박수를 치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야유와 항의를 이어가다, 이 대표의 연설이 끝나자 곧바로 퇴장했다.
물론 이 대표가 성장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 파이(pie)를 키워 복지와 분배까지 이루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이 청사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대표는 자신의 대표 공약인 ‘기본사회’를 다시금 강조했다. 그는 “초과학기술 신문명이 불러올 사회적 위기를 보편적 기본사회로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당력을 총동원해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도 말했다. 동시에 이 대표는 “민생과 경제 회복을 위해 최소 30조원 규모의 추경을 제안한다”고 했다.
‘경제 성장→부의 재분배’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 구축은 이명박(MB) 정부의 정책 목표이기도 했다. 기업이 성장해야 경제가 활성화되고, 그 낙수효과로 분배가 개선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는 노동자 삶의 개선, 최저임금 인상 등에 초점을 맞췄던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과는 상충되는 면이 있다. 즉, 이 대표가 내세운 경제 기조는 MB와 닮았다. 이 대표가 “경제 살리는 데 이념·색깔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변한 배경으로 해석된다.
일각에선 이 대표의 ‘우클릭’이 파격적인 노선 변화가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당장 미국 트럼프 정부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노믹스’와 맞물려 경제난 우려가 가중되면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유력 국가들의 최우선 관심사도 ‘성장동력 확보’가 됐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대표가 최근뿐 아니라 성남시장와 경기지사 시절, 지난 대선에서도 ‘실용주의’를 내세워 왔다는 점도 언급된다.
주 52시간제와 주 4일제 동시 추진? “상호 모순” 지적
이 대표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대표가 ‘계획된 우회전’이 아닌 ‘무분별한 난폭운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표가 정확한 목적지를 설정한 뒤 내비게이션 안내에 맞춰 핸들을 오른쪽으로 튼 것이 아니라, 단지 눈앞의 교통 상황에 따라 핸들을 크게, 쉽게 돌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기본사회’에 대한 이 대표의 태도가 미묘하게, 지속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 대표는 1월2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나누는 문제보다 만들어가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며 ‘기본사회’ 공약 이행의 잠정 보류를 시사했고, 이후 철회하긴 했지만 당 기본사회위원회 위원장직 사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달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는 ‘기본사회’를 다시 꺼내 들었다.
또 이 대표는 2월3일 “몰아서 일하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할 말이 없더라”며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을 명시한 반도체특별법 제정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반도체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를 명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의 특별연장근로 등 기존 제도를 활용하자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 같은 이 대표의 행보를 겨냥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비판이 나왔다. ‘경제통’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2월10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과 관련해 “주 52시간 예외를 검토하는 척하더니 노동시간을 줄여 주 4일 근로 국가로 나아가겠다고 한다”며 “표만 되면 뭐라도 다 하겠다는 조급함에 모순이 되든 말든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재명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냐”고 비판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도 2월11일 SNS를 통해 “일각에서는 (이 대표의) 우클릭에 놀라지만, 저는 새롭지도 두렵지도 않다”며 “이 대표의 ‘말 따로 행동 따로’는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미 지난해 7월 ‘먹사니즘’을 처음 내세워 성장으로 더 많은 기회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후 민주당이 보여준 건 먹고사는 문제나 성장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말과 행동이 달랐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의 노선에 대한 비판은 여권뿐 아니라 야권 일각에서도 제기된다.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2월11일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대표의 교섭단체 연설과 관련해 “소위 우클릭과 AI 시대의 노동시간 단축 등 하나의 정책이 왔다 갔다 하거나, 일종의 그때그때 조금 다른 주장으로 (비친다)”라며 “‘먹사니즘’이나 ‘잘사니즘’이 진정성 있게, 신뢰 있게 이렇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용진 전 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BBS라디오에서 ‘정책적 일관성’을 강조하며 “52시간이라고 하는 노동시간이 경제·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일관된 입장·철학, 기업에 대한 지원이 도대체 어떤 걸 의미하는지에 대한 일관된 모습을 좀 보여야 하루짜리 연설·단타 형식의 정치로 취급되거나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야 이재명의 철학은 이런 거구나, 민주당이 나가려고 하는 건 이런 거구나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치적 소신 아닌 개인적 이유?…‘사법의 시간’ 의식했나
일각에서는 이 대표가 ‘정치적 소신’이 아닌 ‘개인적 이유’로 노선의 급선회를 시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 대표를 둘러싼 ‘사법 리스크’ 우려가 가중되는 가운데, 지지율이 정체되고 이를 고리로 비명계가 ‘선수 교체’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자 급히 ‘산토끼 잡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이 대표가 대선의 화두를 ‘후보의 윤리성’이 아닌 ‘경제’로 돌려, 향후 혹여 있을 민심의 이반을 최대한 방어하려 한다는 얘기다.
실제 이 대표 앞길의 가장 큰 변수로 평가되는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11월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월24일 항소심 첫 재판에서 2월26일 결심공판을 열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경우 이르면 3월 중 항소심 선고가 날 수 있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다면 이 대표의 대권 행보에 탄력이 붙을 수 있으나, 다시 의원직 상실형이 나온다면 그를 둘러싼 여론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월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이 대표의 공직선거법 항소심 선고 결과가 큰 변수가 될 것인지 묻는 질문에 “2심에서 사실 유죄가 확정되면 적잖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이 대표의 우클릭 행보에 대해선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보이면 그렇게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고 본다”며 “(이 대표가) 괜히 모양 갖추기 위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국민이 금방 따라가진 않을 것”이라고 봤다.
이 대표의 최측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대장동 관계자들에게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2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것 역시 이 대표로서는 악재다. 김경율 회계사는 2월10일 시사저널TV에 출연해 김 전 부원장이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것을 언급하며 “우리나라가 경제사범에 대해 관대하다. 징역 5년을 선고한 것은 상당한 중형이고, 어마어마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과연 김 전 부원장이 이 대표도 모르게 이런 일(정치자금 수수 등)을 벌일 수 있을까”라고 반문한 뒤 “해석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만약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에서 유죄가 나와 이 대표 지지율이 하락하면 민주당 지도부의 고민이 깊어질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이 대표의 대권후보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 이 대표로서는 (항소심 결과가 나오기 전) 조금이라도 더 지지율을 올려놓고 싶을 것이고, 그러니 ‘우클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권력 분산’ 개헌 논의엔 침묵
이 대표가 ‘표심’을 얻기 위한 손익계산에만 매몰돼 민주당의 철학, 나아가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2월5일 MBN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이 대표의 최근 행보를 겨냥해 “진보의 가치와 철학을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 푸는 것은 충분히 필요하지만, 가치와 철학이 바뀔 수는 없다”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은 정체성을 분명히 유지해야 한다”며 날을 세웠다.
특히 이 대표가 ‘개헌’ 논의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12·3 계엄사태’ 발생의 근본 원인이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는 만큼 권력 분산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여야 대권 잠룡 사이에서 활발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월12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지자체에 과감하게 넘겨야 한다”며 지방분권 개헌을 주장했다.
민주당에선 비명계를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2월11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은 김두관 전 의원은 “4년 중임제로 권력을 분산하고 지방 소멸을 막을 수 있는 분권형 개헌에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이번 탄핵의 종착지는 이 땅에 내란과 계엄이 다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며 “내란 이전에는 대통령제·책임총리제·내각제와 같은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 개헌의 주요 쟁점이었다. 내란 이후는 불법적 계엄을 어떻게 원천적으로 방지할 것인지가 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앞서 전직 국회의장·국무총리·당대표들로 구성된 ‘나라를 사랑하는 원로모임’도 지난달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내각제’로의 개헌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대표는 개헌론과 관련해 “개헌보다 내란 단죄가 우선”이란 입장을 밝힌 뒤 침묵하고 있다.
‘우클릭’에도 ‘박스권’ 갇힌 李 지지율
현재까지 이재명 대표의 ‘우클릭’은 민심의 변화를 낳지는 못하고 있다. 실제 전국지표조사(NBS) 기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권 교체’ 여론은 줄곧 과반을 웃돌고 있으나 이 대표의 지지율은 30% 내외를 횡보하고 있다. 정권 교체를 바라지만 ‘대통령 이재명’을 바라지 않는 중도층이 적지 않은 셈이다.
새해 들어 엠브레인퍼블릭, 케이스탯리서치, 코리아리서치, 한국리서치가 진행한 NBS조사에 따르면, ‘정권 교체’ 여론은 53%(1월 2주 차)→48%(1월 3주 차)→49%(1월 4주 차)→50%(2월 1주 차)의 흐름을 보였다. 같은 기간 ‘차기 대통령 적합도’ 조사에서 이 대표 지지율은 31%(1월 2주 차)→28%(1월 3주 차)→28%(1월 4주 차)→32%(2월 1주 차)로 나타났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