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텔’은 국어사전에서 ‘동일 업종의 기업이 경쟁의 제한 또는 완화를 목적으로 가격, 생산량, 판로 따위에 대하여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하는 독점 형태, 또는 그 협정’이라고 정의한 경제·법률 용어다. 원래는 ‘서로 적대하는 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서면 조약’을 일컬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중남미 일부 나라의 마약 조직을 지칭할 때 자주 쓰이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커졌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 것은 윤석열 정부 덕분이다. 윤 대통령은 2023년에 건설노조의 행위를 ‘건폭(건설현장 폭력)’으로 규정하고 “임기 내에 건폭을 뿌리 뽑겠다”며 ‘카르텔’이라는 프레임을 집중 부각했다. 그는 또 ‘킬러 문항’ 등을 거론하며 사교육 카르텔을 맹비난했고, 의대 정원 문제로 갈등을 빚던 상황에서는 의료계를 향해 ‘직역 카르텔’이라는 비판을 가한 바도 있다.
이런 윤 대통령의 ‘카르텔 공격’ 취지를 정성껏 이어받겠다는 생각에서일까. 최근의 탄핵심판 국면에서도 이 거창한 외국어 ‘카르텔’이 윤 대통령 측과 그의 강성 지지자들 사이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툭하면 튀어나온다.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사법 좌파 카르텔’을 내세우고, 언론 보도를 문제 삼으며 ‘언론 좌파 카르텔’이란 편 가르기도 서슴지 않는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한술 더 떠 서부지법을 “좌파 카르텔의 근거지”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카르텔 공격의 대상은 언론·사법부 등 특정 기관에만 그치지 않는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하는 일부 유튜버는 아이유 등 인기 연예인에게까지 카르텔 좌표를 찍어 “선거 개표기 업체와 연결돼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전방위 카르텔 공격이다. 이런 식이면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투입된 뒤 소극적으로 행동한 군인들은 ‘임무수행 나태 카르텔’이고, 2023년 윤 대통령에 대해 “빛나는 태양, 구국의 지도자”라고 표현한 민주평통 고위직 인사와 윤 대통령 생일 축하행사를 열어 ‘하늘이 보내주신 대통령이 태어나신…’이란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경호처 간부는 ‘추앙 카르텔’이 아닌지 묻고 싶어질 정도다.
경제·법률이나 외교 부문에서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할 ‘카르텔’이라는 용어가 특정 세력의 공격 무기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그 단어가 파급할 ‘적대적 감정’의 확산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렇게 닥치는 대로 카르텔 딱지를 붙인다면 머지않아 대한민국 전체가 더 큰 혼돈과 맞닥뜨릴 것이 빤하다.
그렇지 않아도 12월3일 이후 우리 사회를 덮친 분열이란 ‘불의 고리’는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아직껏 사라지지 않은 ‘지역 감정’이라는 강고한 허들을 넘어 이제는 ‘세대 갈등’과 ‘성별(性別) 갈등’까지 층층이 겹쳐진 상황이다. 정신적 내상이 신체적 상처보다 더 깊은 앙금을 남길 수 있듯이, 심리적 내전의 후유증은 긴 시간 우리 사회를 짓누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런 질곡이 윤석열이라는 개인 권력의 구조, 즉 현상의 세계로부터 비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극단적 통치 방식과 메시지들을 통해 남겨놓은 편향과 대립이라는 나쁜 유산 또한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지난해 말 광장 집회에 나와 “‘국가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국민들이 더 많이 노력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 어느 시민의 말이 그래서 더 깊이 가슴에 남는다.
이 난폭한 카르텔 파도를 눌러 이길 힘은 결국 분열에 무감각한 정치권이 아닌, 공감으로 뭉친 시민들의 양식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비춰볼 때 국가·사회라는 거대 정신세계에서 야만성(이드)과 광기(초자아)에 맞서 자아의 중심을 제대잡는 일은 끝내 시민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