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레전드’ 이병헌, ‘바둑 레전드’로 컴백
명실상부 대한민국 연기 레전드 이병헌이 올봄 영화 《승부》로 스크린에 컴백한다. 영화 《승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이 제자 이창호(유아인)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승부》는 바둑이 최고의 두뇌 스포츠로 추앙받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바둑 레전드 조훈현 국수(國手)를 실제 모델로 삼은 영화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이니만큼 캐스팅에서는 그 어떤 배역보다 신중했다는 후문.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김형주 감독은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를 쓰자마자 이병헌이 적역이라고 생각했다며 “고수의 풍모, 당당함, 무너졌을 때의 처절함까지 극과 극의 감정 표현을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로 이병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바둑판을 앞에 두고 눈빛의 떨림까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그가 이병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승부》의 포스터와 예고편 등을 통해 공개된 이병헌의 모습은 조훈현 국수의 젊은 시절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는 반응이다.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는 바둑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큰 흥미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은 뒤엔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스스로 몰입됐기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병헌은 제작진이 준비한 다양한 자료와 함께 조훈현 국수를 직접 만나 철저히 분석하며 캐릭터를 완성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룰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납득이 가는 대국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감정을 세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의 심리를 캐치할 수 있게끔 신경 썼다”고 연기 비하인드를 전했다.
사실 《승부》는 어쩔 수 없이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 대결이 관전 포인트다. 애초엔 극장 영화가 아니라 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작품이었다. 하지만 유아인의 마약 파문으로 인해 공개가 무기한 연기됐다. 결국 《승부》는 넷플릭스에서 극장 개봉으로 변경한 후, 유아인을 편집하지 않은 채 개봉하는 강수를 뒀다. 현재 실시간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3월26일 기준). 이병헌을 직접 만나 《승부》의 개봉 소감과 연기관을 들었다.
부침이 많았던 영화다. 개봉 소감이 궁금하다.
“떨리면서도 신난다. 우여곡절을 겪어서인지 관객들을 스크린을 통해 만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사실 개봉되기 전까지 극장이 아닌 OTT로 공개한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확실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 작품을 보여줄 때가 의미가 남다르다. 물론 그동안 감독님이 마음고생이 컸을 것이다. 《보안관》을 찍고 이후 정성껏 만든 영화가 혹시나 관객을 못 만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아마 그 친구(유아인)일 것이다.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그렇다.”
이번 작품도 그렇지만 종종 영화 속에서 실제 인물을 연기했다.
“늘 부담스럽다. 더구나 이번에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분이고, 심지어 과거 드라마 《올인》에서 제가 연기한 실제 인물과 공교롭게 절친이시다(웃음). 그분들의 생애 한 부분을 연기했다는 게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기댈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반면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존재한다. 그분을 직접 만나서 외형, 눈빛, 버릇 등등 그분을 흡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픽션에 기반해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야 한다. 연기를 하면서 이른바 놀 수 있는 게 제한적이다.”
조훈현 국수를 직접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나.
“사람 사는 얘기를 나눴다. 굵직굵직한 대국을 앞둔 마음가짐이나,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등등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데 그 자리에 사모님이 함께 나오셔서 깊은 얘기를 할라치면 넌지시 말리셔서. 하하. 그래서 이야기 자체보다 그분의 성격, 심성, 습관 같은 것들을 관찰하기 위해 더 애를 썼다. 조훈현 국수님이 시사회에 오셨는데, 저를 보자마자 ‘예고편을 보고 난 줄 알았어’ 하시더라. 다행이다 싶더라.”
조훈현 국수는 어떤 사람인가?
“본인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하하. 무엇보다 말씀하는 걸 좋아하신다. 그래서 만난 날도 거의 듣고 왔다. 사실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워낙 방대했다. 많은 부분을 비슷하게 가려고 애를 썼다. 제 원래 눈썹을 지우고 조 국수님처럼 위로 향하게끔 그리는 등 외모적으로도 닮게 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예고편을 보고 많은 분들이 인상이 변한 것 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 사소한 버릇도 챙기려고 노력했다. 현장에서도 인터넷 자료를 다시금 보며 고증했다.”
이 영화는 결국 사제지간 이야기가 핵심이다. 조훈현 국수가 제자 이창호에게 패하는 모습이 중요한 장면이다.
“그게 이 영화의 핵심적인 감정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조 국수님 입장에서는 여러 감정이 스쳤을 것 같다. 조 국수님을 만났을 때 여쭤보니 질 거라는 생각을 아예 못했다고 하시더라. 당시 그곳에 모인 기자들이 패배한 조 국수님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댔을 때 그 기분은 어땠을까.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홀로 나와 바깥 공기를 딱 마셨을 때 드는 감정은 또 어땠을까. 그 부분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 신이 계속 만족스럽지 않아 몇 주 후에 다시 찍자고 제안했을 정도다. 그만큼 욕심이 났다.”
실제로 배우로서 연기 잘하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올 때 그런 감정을 느꼈던 적은 없나.
“바둑은 승과 패로 갈린다. 하지만 연기는 상대 배우가 뛰어난 연기를 해주면 나도 같이 빛이 난다. 함께한 배우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나도 덩달아 신나서 함께 연기가 끌어올려진다. 실제로 《남산의 부장들》 《남한산성》 때가 그랬다. 상대 배우들과 연기를 하면서 순간순간 놀랐던 적이 많다. 부러움도 있었지만 설렘도 공존했다. 승패로 좌우되는 스포츠 경기라면 경쟁심이 가득했겠지만 연기는 조금 다른 영역인 것 같다.”
좋은 대사가 많이 나온다.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
“‘또 창호 너냐?’ 하는 대사, ‘어쩔 수 없이 이것이 승부니까’ 하는 마지막 내레이션도 좋았다.”
바둑에 관한 얘기다. 평소에 바둑을 두나?
“바둑에 대해선 정말 몰랐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오목은 누구보다 많이 뒀다. 교과서나 노트에 칸을 그려서 짝꿍과 많이 뒀다. 이번 작품에서는 바둑의 룰보다도 바둑을 능숙하게 두는 손짓이 중요해 바둑판을 집에 가져다 두고 아들과 오목을 많이 뒀다.”
흔히들 바둑이 인생과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인생이나 바둑이나 복잡한 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오목을 같이 둔 아들이 이번 영화에 어떻게 반응했나.
“아들이 《광해》를 피렌체에서 보고, 얼마 전에 《공동경비구역 JSA》를 봤다. 그리고 이번에 《승부》를 봤는데, 그중 《승부》가 제일 재미있다고 하더라.”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저한테 주는 재미가 우선이다. 주관적일 수 있지만 대중성보다는 일단 제가 만족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선택한다. 재미가 우선이고 캐릭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의 경우는 관련 다큐를 보면서 이게 실화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이 영화에 참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지 않나. 자기가 꼬마 때부터 키워온 아이와 결승에서 붙고,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국 진다.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다. 한집에서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모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쪽에선 담배를 피우고, 한쪽에서는 바둑 두는 소리가 들리는 묘한 집 안 분위기와 정서들이 이 영화가 가지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영화 홍보 때문에 유튜브에 많이 출연한다.
“작품에 대한 얘기만 할 수 없으니 결국 내 얘기를 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뭐랄까, 다 끝나고 나면 조금 허탈해지는 느낌도 있다. 발가벗겨진 느낌이랄까. 현재까지 《짠한형》과 《핑계고》에 출연했는데, 긴 토크쇼를 동시에 두 번 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한 말을 저기서도 한 것 같고, 잘 모르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