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에서 수시 채용으로 전환하는 시대적 흐름 거스르긴 어려워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시급…일자리 자체보다는 ‘디딤돌’ 만들어줘야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에 법인세 감면, 정부 사업 입찰 시 가점 부여,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우대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며 ‘30대 그룹 신입사원 공채 장려 정책’을 제안했다. 선거를 앞두고 제시되는 일자리 공약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일자리 창출 기업에 세제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방안 역시 그동안 숱하게 논의되었다. 그런데 이 공약의 방점은 ‘채용’에 찍혀 있지 않다. 핵심은 ‘공채’다.
아직도 채용이라고 했을 때 공채를 떠올린다면 옛날 사람이다. 요즘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들, 구체적으로 2000년대에 태어난 Z세대의 구직 환경은 앞선 세대인 밀레니얼(M)의 그것과도 사뭇 다르다. 밀레니얼 세대의 구직 환경은 경쟁이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이들은 ‘에코 세대’라는 별칭답게 수가 많다. 1980~90년대 초 매년 70만 명 안팎의 아기가 태어났다. 2000년대 출생아 수는 40만 명 초중반에 그친다. 경쟁 강도만 놓고 보면 비교가 안 된다. 2011년 93.3대 1까지 치솟았던 9급 공무원 채용시험 경쟁률은 밀레니얼 세대가 직면해야 했던 극심한 경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번 중소기업은 영원한 중소기업”
Z세대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의 고충은 경쟁 강도보다 기회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단지 저성장이 고착되고 국제 분업이 증가하며 일자리가 없어졌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공채를 폐지하고 수시 채용으로 전환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수시 채용에선 아무래도 신입보다 경력직이 선호된다. 경력직 선호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첫 관문부터 그렇게 되어버리니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구직자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청년들은 말한다. “경력 없는 사람은 어떻게 취업하느냐”고.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공채 폐지는 2019년 현대차를 필두로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SK·LG·롯데 등이 뒤따랐다. 현재 국내 5대 그룹 중 공채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삼성이 유일하다. 수시 채용이 늘어나니 ‘경력 없는 신입사원’ 비중은 줄어들었다. 2019년 47%였던 게 2022년 40.3%가 됐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23년 근로자 500인 이상, 매출액 1조원 이상 대기업 100곳의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기업들이 중·고등학교 하나를 통째로 빌려 필기시험을 치르던 장면은 점점 옛것이 되어가고 있다.
기업으로선 직무별로 필요한 인력을 그때그때 충원하는 게 효율적이다. 시장 변화가 빨라지며 예전처럼 상·하반기 채용 일정을 기다리기 어려워졌다. 산업 고도화로 현장에서 요구되는 기술 수준도 높아졌다. 준비되지 않은 직원은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투입되는 비용을 높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채 제도를 유지해온 또 다른 전제 조건에도 변화가 생겼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채용한 뒤 끊임없는 교육훈련을 통해 이들을 자사 인재상에 걸맞은 일꾼으로 바꿔나갔다. 요즘도 온라인에서 떠돌고 있는 모 재벌 대기업의 신입사원 수련회 카드섹션은 그와 같은 교육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이 높은 비용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기껏 키워놓은 직원이 몇 년 다니다가 그만두면 회사는 그만큼 손해다. 그런데 요즘 한 직장에 뼈를 묻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잦은 이직은 예사다. 어차피 회사가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게 아니라면 개인도 직장에 인생을 바칠 이유가 없다. 소속보다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직장보다 직업”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기업은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공채가 없다면 어디라도 들어가서 경력을 쌓는 게 낫지 않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청년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첫 직장 수준이 향후 커리어에도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다. “한번 중소기업은 영원한 중소기업”이라는 풍자 섞인 농담도 있지 않나(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중소기업은 단지 직원이나 매출 규모가 작은 기업을 뜻하는 게 아니다. 조직문화가 나쁘고 근로조건과 처우도 형편없는 기업을 뜻한다).
실제로 통계청이 지난해 6월 발표한 ‘2022년 일자리이동통계 결과’에서도 중소기업 출신 이직자가 대기업으로 옮긴 경우는 12.0%에 그쳤다. 대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동은 38.1%였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중압감은 취업 준비 기간의 연장으로 이어진다. 이 기간이 길어지면 손을 놓아버린다. 50만 명이 넘는다는 ‘쉬었음 청년’ 중엔 이런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손해다.
단편적인 정책보다 구조 바꾸는 노력 필요
사실 공채라는 건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절, 기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쓰일 수 있는 인재를 필요로 했다. 공채는 그들이 양질의 인력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게 하는 창구였다. 그렇게 선발된 신입사원들은 교육훈련을 거쳐 산업의 최전선에서 기업과 나라 경제를 이끌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채용 주체인 기업들이 직면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공채는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청년 세대의 가치관도 바뀌고 있는데 기업이 과거의 채용 제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정부가 얼마간의 지원을 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공채에 따르는 비효율을 온전히 보상해 주는 게 아니라면 공채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직무 관련 경력이 없는 청년들로서는 취업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일자리 정책은 인위적인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일자리 수치를 개선하는 데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공공 차원에서 일자리를 몇 개 만든다든지, 기업에 각종 지원을 함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하는 식이다. 이런 방법이 필요한 때도 있겠지만 지속 가능하다고 볼 순 없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공채에서 수시 채용으로 전환되는 시대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보함으로써 이직을 통해 계속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줘야 하고, 정부가 나서서 직무 경험이 없는 청년들을 위해 마중물 역할을 해주는 일도 필요하다. 구직활동 중인 청년들에게 유명 기업 인턴 기회를 제공하는 서울시의 청년 예비인턴 제도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청년들이 겪고 있는 일자리 문제는 결국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결국은 단편적인 정책보다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더 큰 보탬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