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3연임’ 무너뜨리고 대한체육회장에 당선
“위계질서 내세운 체육계 내부 문화 이젠 달라져야”
그야말로 대이변이었다. 한국 스포츠를 이끌어갈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파란이 일어났다. 3선에 도전하는 이기흥 현 회장과 강태선 서울시체육회장 겸 BYN블랙야크그룹 회장, 강신욱 단국대 명예교수 등 체육계에서 잔뼈가 굵은 70대 베테랑들을 아들뻘인 43세 후보가 제쳤다.
유승민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겸 대한탁구협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유 전 회장은 1월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열린 회장 선거에서 총 투표수 1209표 중 417표로 최다 지지를 받았다. 379표를 얻은 이 회장을 38표 차이로 제치고 42대 회장 당선인으로 결정됐다.
종목별 단체장 선거에서 이미 변화 조짐 나타나
당초 이번 선거는 이기흥 회장의 3연임이 유력한 것으로 예상됐다. 앞서 두 번의 선거에서 이 회장은 약 33%, 46%의 지지로 당선된 만큼 이번에도 30~40% 득표율을 얻을 것으로 전망됐다. 회장 8년 동안 체육계를 누빈 저력으로 콘크리트 지지 기반을 더욱 다졌다는 평가가 많았던 터다.
유승민 전 회장도 2004년 아테네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에 IOC 선수위원 등 가장 높은 인지도와 젊은 패기를 앞세워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982년생,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가 약점으로 꼽혔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한국 체육계에서 나이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유 후보는 어릴 때부터 각 분야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체육인으로 참신한 이미지가 장점이지만, 체육회장으로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체육계의 의견이 적잖았다”면서 “연배가 높은 체육인들은 아직 경륜이 있는 후보를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여기에 이른바 ‘반(反)이기흥’ 전선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못한 점도 우려를 낳았다. 유 전 회장은 강태선 회장, 강신욱 교수 등과 단일화 논의를 진행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역대 최다인 6명의 후보가 난립한 상황이 이 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 회장은 2016년과 2021년 선거에서도 상대 후보들의 단일화 무산으로 어부지리를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강했다. 한 종목 협회장은 당초 유 전 회장과 강 회장의 단일화를 위해 다리를 놨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 전 회장이 예상을 뒤엎고 당당히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이를 두고 변화를 열망하는 체육계 분위기에 유 당선인 특유의 열정을 앞세운 진심이 통했다는 분석이 많다. 선거 전부터 젊은 체육인 사이에서는 개혁을 바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 종목 단체 관계자는 “연배 있으신 선배들의 위계질서를 내세운 문화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면서 “특히 권력 싸움이 아니라 한국 스포츠를 위해 봉사하고 개혁하는 후보가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미 다른 종목 단체장 선거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현 회장 프리미엄보다 개혁 바람이 더 거셌다. 대한씨름협회 황경수, 대한럭비협회 최윤 회장 등이 새 도전자에 밀려 낙마했다. 황경수 회장은 이만기·강호동 등 스타들을 키운 씨름 대부로 통하고, 최윤 회장은 프로배구 남자부 OK저축은행 구단주이자 2021년 도쿄올림픽 선수단 부단장을 지낸 거물이지만 연임이 무산됐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을 이끌었던 ‘치킨왕’ 윤홍근 제너시스BBQ그룹 회장도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 42세의 이수경 삼보모터스그룹 사장이 회장 선거에 나서자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유승민 후보의 당선에 대해 “다른 종목 회장 선거를 보면서 체육계 전반적으로 바꾸자는 분위기가 감지됐다”면서 “막판에 강 회장이 치고 올라오기도 했지만 유 후보의 승리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유 당선인의 뜨거운 열정과 초인적인 체력이 판도를 바꿨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유 당선인은 회장 선거운동 기간에 하루 25km를 걸으며 체육인들을 직접 만나 소통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IOC 선수위원 후보로 나섰을 때도 유 당선인은 태극기가 꽂힌 백팩을 메고 선수촌을 누볐다. 땡볕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악수를 나눈 유 당선인에게 선수들은 기꺼이 표를 던졌다.
이기흥, 사법 리스크 끝내 극복 못 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유 당선인과 절친한 세 살 선배 테니스 국가대표 출신 임규태 KBS 해설위원은 “지난해 12월22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에서 한국동호인테니스협회(KATA) 성기춘 회장 등 동호인들 모임이 있었다”면서 “그런데 유 당선인이 전북 순창에서 체육인들을 만나고 올라왔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러고는 다른 일정을 위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유 당선인은 약 3개월 동안 체육회 가맹 68개 전 종목을 직접 체험하며 체육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탁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IOC 선수위원, 전 탁구협회장, 전 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 위원장 등 화려한 경력에도 몸을 낮춰 직접 뛰는 정성까지 연륜의 열세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아테네올림픽 당시 탁구 남자대표팀 코치로 유 당선인의 금메달을 도운 김택수 미래에셋증권 총감독은 “선수는 물론 IOC 위원과 협회장 등 현장과 행정 경험이 풍부한 유 당선인 자신이 가장 큰 무기였기에 단일화가 되지 않고도 이 회장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밝혔다.
반면 이기흥 회장은 최근 정부와 마찰을 빚으면서 불거진 사법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했다. 국무조정실 정부 합동 공직 복무 점검단은 이 회장을 업무방해와 금품 등 수수·횡령·배임 등 혐의로 수사 의뢰했고, 문화체육관광부도 이 회장에 대한 직무정지 결정을 내렸다. 파리올림픽 당시 문체부가 마련한 환영행사를 보이콧하고, 예산과 관련해서도 정부와 첨예한 갈등을 야기한 이 회장이 한국 체육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사실 이 회장은 앞서 두 번의 선거에서는 한국 체육을 위해 정부와 맞서는 투사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정부와 교감한 후보들을 꺾고 당선됐고, 엘리트와 생활체육 통합 이후 이전 정부의 체육 정책에서 소외된 전문 체육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3선을 위한 권력 사수에 더 신경을 썼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종목 협회장은 “예전과 달리 이 회장이 상대적으로 곤란에 처한 주변 사람들을 돕는 데 성의를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면서 “그러니 몸을 던져 이 회장의 당선을 위해 나서는 사람도 적었던 것 같다”고 짚었다. 또 다른 체육인은 “이 회장이 전에는 정부의 부당한 요구에 당당하게 의견을 밝혔는데 최근 토론회 등을 보면 논리적으로 무리한 주장이 많아지는 등 총기를 잃은 듯 보였다”고 전했다.
반면 유 당선인은 김 감독을 비롯해 현정화 한국마사회 감독, 유남규 한국거래소 감독 등 든든한 탁구계 레전드 선배들이 힘을 실어줬다. 현 감독은 2244명에 달하는 선거인단에 일일이 전화하느라 목이 쉴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유 당선인의 ‘위드유(With You) 캠프’에는 최영일 마사회 감독, 탁구협회 정해천 사무처장, 조용순 감독 등 탁구인들을 비롯해 경희대 김도균 교수, 대한하키협회 신정희 부회장 등 체육인, 유 회장이 위원장을 맡았던 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 관계자 등이 똘똘 뭉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 한국 체육은 이기흥 시대를 지나 유승민이라는 젊은 수장이 이끌게 됐다. 유 당선인은 선거 뒤 IOC 위원 도전 등 개인의 영달보다는 무너진 학교 체육과 정부와의 갈등 해소 등 스포츠 현안에 먼저 관심을 갖겠다고 밝혔다. 43세 역대 최연소 회장이 한국 체육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