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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흔드는 ‘트럼프 변수’ 어떻게 될까…경제·안보 ‘빅딜’ 성사 주목

정부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국과 무역 협상을 매듭짓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서 형태의 합의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내겠다는 목표다. 양국은 연일 “대부분의 쟁점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강조하며 협상 타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 정부가 국익을 지키면서도, 실질적인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지 시선이 모인다.

7월30일 무역 협상 타결 이후 지지부진했던 한미 무역 협상은 이달 들어 급물살을 탔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달 두 차례 방미해 막판 쟁점을 두고 대면 협상전을 이어갔다. 김 실장은 10월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마지막 대면 협상을 마친 뒤 “대다수의 주제는 미국과 의견이 많이 근접했고, 한두 가지 주제에서 양국의 입장차가 크다”며 “2시간의 협상을 통해 남은 쟁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일부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

협상 막바지 현금·분납·투자처 셈법 복잡

현재 양국 협상의 마지막 쟁점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다. 양국은 ①한국 측이 실제로 투자할 현금 규모 ②투자금 분할 납입 여부와 방식 ③투자처 결정권을 두고 치열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당초 미국은 3500억 달러를 전액 현금(달러)으로, 일시불·선불 납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할 경우 외환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미국을 설득했고, 최근 미국은 한국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매년 250억 달러씩 8년간 분납해 총 2000억 달러를 현금 투자하고, 나머지 1500억 달러는 대출·보증 형태로 조달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 쟁점에 포함됐던 한미 통화스와프는 우선순위에서 다소 밀린 모양새다. 통화스와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의 별도 협상이 필요한 데다, 협상 과정에서 대미 투자의 현금 규모를 줄이게 된다면 외환시장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22일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통화스와프의 필요성과 규모는 투자 구조에 따라 아예 필요 없을 수도 있고, 소규모로 추진될 수 있다”며 “미국은 대규모 선투자 방식이 한국 외환시장에 충격을 줄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 대응 방식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 한국산 자동차에 부과되는 25%의 품목관세를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구 부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 당국자들에게 (일본산 자동차와 비교해) 한국 자동차 관세의 불리함을 지속적으로 제기했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며 “계속해서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국 협상이 지난 3개월간 교착상태를 이어온 배경에는 국익을 둘러싼 치열한 힘겨루기가 있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9월11일 “서울(한국)에 유연함은 없다. 한국은 협정을 수용하거나, 25% 관세를 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재명 대통령 또한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좋으면 사인해야겠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 사인을 왜 하느냐”며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팽팽하던 협상 테이블의 분위기가 달라진 건 APEC 정상회의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의 성과 압박감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중간선거를 1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APEC을 계기로 말레이시아, 일본, 한국을 잇따라 방문하는데, 이를 통해 ‘외교 성과 부풀리기’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 협상을 앞두고 한국을 ‘완벽한 우군’으로 확보해 협상 주도권을 강화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수위도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다. 그는 10월17일 “한국은 수십 년간 미국을 이용해 왔다. 이제 우리는 공정한 대우를 원한다”며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사흘 후인 10월20일에는 “한국은 미국을 이용하려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한국과 매우 공정한 무역협정을 만들어냈다”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식 ‘거래 외교’에 대한 미국 내부의 피로감이 커진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0월21일(현지시간) 사설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협상의 일환으로 외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은 투자는 규모가 막대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미국의 통치 구조와 재정 능력에도 의문을 품게 만든다”며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는 3년간 나눠서 분담해도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6.5%에 해당한다. 사실상 분담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안보 ‘일괄 타결’ 가능성 주목

외교가에서는 한미 양국이 APEC을 계기로 관세·투자 패키지를 포함한 합의 내용을 문서화해 발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국은 지난 7월 무역 협상을 문서화하지 못해 받았던 비판을 해소할 수 있고, 미국은 문서를 통해 ‘실질적 성과’를 입증하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어서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그동안 경제·무역 분야에 집중됐던 협상이 국방·안보 분야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간 정부는 “관세 협상과 안보 협상은 별개”라며 주한미군 감축, 원자력 협정 개정 등의 문제를 무역 협상에서 분리해 왔다. 그러나 APEC을 앞둔 양국이 협상 성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원자력 협정 개정안까지 포함한 ‘패키지 발표’를 준비 중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10월2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안보 분야 협상에)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안이 포함됐으며, 큰 방향에서는 합의가 됐다”며 “우라늄 농축,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등을 강력하게 요청했고, 협상을 조만간 시작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방위비 분담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이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바이든 행정부 당시 합의를 준수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다만 김용범 실장이 10월22일 “쟁점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APEC 회의로 인해 일부 내용만으로 MOU(양해각서)를 맺는 것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힌 만큼, 양측이 공동성명이나 MOU 체결이 가능한 수준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팩트시트(Factsheet)’ 형태로 정리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남은 쟁점을 두고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 협상이 APEC 회의 이후로 지연될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김 실장은 이날 미국에 도착해 “양국 간 협상 진도가 꽤 마지막까지 와있다”고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협상이 종료된 후에는 “막바지 단계는 아니다. 협상이라는 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며 “잔여 쟁점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논의를 더 해야 한다”고 입장을 다소 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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