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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세 인상’ 꺼낸 英 재무장관 “관세·물가상승률 악재…정치보다 국익이 먼저”
英 노동당, “증세 없다” 공약 깰 듯…일각에선 ‘IMF 구제금융설’까지 제기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금을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걷을 것인지는 민감한 주제였다. 일방적으로 특정 계층의 세금 부담을 늘릴 경우 강력한 정치적 반발과 갈등이 초래됐으며 극단적인 경우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 모두 세금을 누가 더 내야 하는지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 국가는 유권자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유권자에게 더 많은 지원과 복지를 약속한 세력은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재정 상황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공약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실망한 유권자는 다음 선거에서 해당 정치 세력을 응징한다. 

최근 세금을 둘러싼 논의가 거세게 불거지는 곳은 영국이다. 영국 노동당은 2024년 총선 당시 소득세, 부가세 그리고 국민보험(NIC·영국 사회보험)을 인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일반적으로 좌파 정부는 더 많은 지출을 통한 복지 확대를 추구하면서 증세를 단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당은 이와 같은 국민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증세는 없다’는 공약을 문서화하면서 유권자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집권 노동당은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1월26일 예정된 내년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은 11월4일 이례적 연설을 통해 국민에게 국가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26일에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했다. 명시적으로 증세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미래를 위해 투자가 필요하지만 현재의 재정 상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규모 세금 인상이 불가피함을 암시한 것이다. 

현재 영국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다. 공공부채는 GDP(국내총생산)의 100%를 넘어서고 있으며, 전체 예산의 10%는 국채 이자로 지급되고 있다. 지속적인 재정적자로 인해 국채 발행이 증가하면서 영국의 재정 건전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재정난을 견디지 못한 영국 정부가 1970년대처럼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10월27일 기후운동단체 ‘그린 뉴딜 라이징’ 활동가들이 영국 런던 재무부 건물 앞에서 재무장관 레이첼 리브스의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초부유층에 대한 부유세 도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10월27일 기후운동단체 ‘그린 뉴딜 라이징’ 활동가들이 영국 런던 재무부 건물 앞에서 재무장관 레이첼 리브스의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초부유층에 대한 부유세 도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전체 예산의 10%를 국채 이자로 상환

이런 상황에서 취임한 리브스 재무장관은 집권 이후 매년 재정적자를 줄인다는 재정 원칙을 내세웠지만 달성하긴 쉽지 않다.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서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지만 과거 보수당 시절 지출 축소로 인한 사회보장 체계 및 주요 인프라 붕괴를 경험했던 영국인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여기에 더해 영국 예산 당국의 새로운 추산에 따르면 영국 경제의 생산성 향상이 과거 예측에 비해 둔화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200억~300억 파운드의 추가 재정적자가 불가피해졌다. 정부로서는 적자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300억 파운드의 추가 세수를 확보해야 한다.

노동당 정부가 추진하는 방안은 소득세율을 인상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1975년 소득세율을 인상한 이래 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소득세율을 건드린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현재 영국 소득세율은 20%, 40%, 45%의 3단계 구간으로 돼있다. 리브스 재무장관은 이를 모두 2%포인트(p)씩 일괄적으로 인상하는 안을 고려하고 있다. 국민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소득세율을 인상하는 대신 국민보험 요율은 2%p 인하하는 방안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세금이 증가하지 않지만, 소득세는 내고 있지만 연금보험료를 납부하지 않는 비근로자들은 오른 세율만큼의 소득세를 부담해야 한다. 영국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 약 60억 파운드(약 11조5676억원)에서 최대 100억 파운드(약 18조2700억원)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지 않겠다는 당초 공약을 지키면서 세수를 확충하겠다는 구상인 것이다. 

여기에 지난 보수당 정권 때 도입했던 개인소득세 납부 기준 동결을 당초 예정했던 2028년보다 2년 연장해 2030년까지 유지하면 매년 100억 파운드를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추정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지속된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했는데 납부 기준을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동결할 경우 더 많은 납세자가 고율의 세금 구간으로 이동함에 따라 소득세 납부가 증가한다는 개념이다. 

국민보험 가입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국민보험 명목으로 국가가 징수하는 세금은 노후 연금 지급은 물론 실업급여, 병가수당 및 의료 서비스 비용에 활용되고 있는데 변호사나 회계사 같은 전문직 또는 임대사업자 등은 제외되고 있었다. 최근 고소득 변호사를 중심으로 수임료가 급등하고 있는데 이들을 모두 국민보험에 포함시킬 경우 연간 19억 파운드의 세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임대사업자에게도 최대 28%의 국민보험 요율을 적용할 경우 약 30억 파운드를 추가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9월29일 영국 리버풀에서 키어 스타머 총리(왼쪽)와 재무장관 레이첼 리브스가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을 마친 후 언론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 연합
9월29일 영국 리버풀에서 키어 스타머 총리(왼쪽)와 재무장관 레이첼 리브스가 노동당 전당대회 연설을 마친 후 언론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EPA 연합

반발 큰 소득세 대신 도박세·은행세 인상?

노동당 내부적으로는 소득세율 인상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대신 도박세와 은행세를 인상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온라인 카지노, 슬롯머신, 스포츠 베팅 등에 대한 세금 인상을 통해 약 32억 파운드(약 6조1700억원)의 추가 세수를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은행세는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로 인해 얻은 이익에 대해 과세하는 방안으로 최대 80억 파운드(약 15조4230억원) 징수가 예상된다. 관련 업계는 당연히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도박 업계의 경우 세금 인상은 수천 명의 일자리 감소와 더불어 도박을 다시 지하경제로 밀어넣어 국가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대표 업체인 벳프레드의 경우 세금 인상이 실제로 이뤄질 경우 1300개 매장을 모두 폐쇄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은행계도 추가 증세는 런던의 금융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지름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노동자 부담을 줄이고 자산가 부담을 늘리기 위해 지방세율을 조정하거나 별도 구간을 신설해 고가 주택 소유자들을 대상으로 42억 파운드(약 8조802억원)를 확보하자는 구상도 제시되고 있다. 재산세는 지방세지만 고가 주택에 대한 재산세 일부를 국세로 전환하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종합부동산세와 비슷한 세제가 영국에서도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증세를 위한 영국 정부의 고민과 대안 검토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점점 더 많은 예산을 위한 세수가 필요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다.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어디서 세수를 확보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도 본격화할 것이다. 비합리적 조정과 타협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우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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