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리벳 2025’가 보여준 J콘텐츠 열기와 그 이면
획일성에 피로한 MZ세대, J팝에서 다양성을 찾다
11월14일부터 3일간 킨텍스에서 열린 ‘원더리벳 2025’에는 J팝을 들으려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사흘간 무려 4만 명의 인파가 결집한 이 행사는 이제 J콘텐츠가 더 이상 소수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드러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을까.
“‘ㅐ’와 ‘ㅔ’ 발음을 모르겠어. 알려줘!” 킨텍스에서 3일간 열린 ‘원더리벳 2025’ 마지막 날인 11월16일. 무대에 오른 J팝 아티스트 유이카(Yuika)는 관객들에게 이같이 물었다. 그러더니 두 모음을 허공에 써 보이며 관객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관객이 발음을 하나하나 읽어주자, 유이카는 차이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관객들은 “가와이(귀여워)”를 외쳤다.
이 광경은 ‘원더리벳 2025’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J팝 아티스트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한국 관객들이 열광한다. 때때로 일본어 가사를 떼창하면서 J팝 아티스트를 놀라게 만든다. J팝 아티스트는 어색한 한국어라도 애써 꺼내며 관객과 소통하고, 잘 못한다며 미안해한다. 관객들은 “다이조부(괜찮아)”를 외치며 화답한다.
음악이지만, 음악을 뛰어넘는 소통의 장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J팝을 통한 소통이다. 아티스트들이 일본어로 말해도 척척 호응하는 관객들은 이미 J팝, 나아가 J콘텐츠를 통해 언어까지 익숙해진 느낌이다. 해외 공연장에서는 외국 팬들이 한국어로 K팝을 떼창하는 장면이 펼쳐진다면, ‘원더리벳 2025’에서는 J팝 가수들의 노래에 한국 관객이 일본어로 떼창하는 광경이 연출된다. 2023년 파일럿 성격으로 시작한 ‘원더리벳’은 오타쿠를 겨냥한 J팝 페스티벌에 가까웠다. 그러나 예상 밖 호응 속에 작년 행사는 2만5000명 관객을 동원하며 국내 대표 J팝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는 그보다 더 성장했다. 3일간 총 4만 명 이상의 관객이 참여했다. 내년 공연도 이미 확정됐고, 공연 규모도 올해보다 넓혀 킨텍스 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단 몇 년 사이 급성장한 ‘원더리벳’의 모습은 무얼 말해 주는 걸까.
J팝이라는 서브컬처 혹은 다양성에 대한 갈증
J팝 열풍은 2022년 하반기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확산되기 시작했다. 2023년 재패니메이션(일본과 애니메이션의 합성어)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OST를 통해 알려진 아티스트들이 주목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의 인기와 더불어 요아소비의 《아이돌》이 떠올랐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흥행과 함께 OST를 부른 텐피트와 래드윔프스의 인기도 급상승했다.
일본 아티스트들의 내한 공연도 급증했다. 후지이 카제의 고척돔 공연은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오피셜히게단디즘과 요아소비, 요네즈 켄시 같은 빅 콘서트가 국내 콘서트장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J팝 열풍은 K팝 신에도 영향을 미쳐 (여자)아이들의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역주행을 이끌고, 데이식스와 QWER 같은 밴드 음악을 주류 한가운데로 끌어올렸다. ‘원더리벳 2025’는 이런 J팝 열풍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페스티벌이었다. 범프 오브 치킨, 이키모노가카리, 스파이에어 같은 헤드라이너가 한자리에 모인 이 라인업은 일본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원더리벳 2025’에 참여한 J팝 아티스트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양성’이다. 이들은 K팝 아이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개성을 드러낸다. 밴드 아티스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정형화된 외모를 내세우지도 않고, 정해진 퍼포먼스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밴드는 물론 싱어송라이터, 버추얼 아티스트, 애니메이션 OST 아티스트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예를 들어 밴드 펜트하우스(Penthouse)는 재즈 기반의 음악을 선보이고, 메종데(MAISONdes)는 여러 보컬이 참여하는 프로젝트 그룹이다. 《최애의 아이》 OST로 유명한 Queen Bee는 본명·국적·생년·성별을 모두 비밀에 부친 채 양성적인 음색을 넘나드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혼성 밴드로 자리 잡았다.
음악뿐 아니라 비주얼에서도 이들은 각자의 매력을 드러낸다. 다소 통통한 체형이든, 키가 작든 자신들의 개성으로 내세운다. 이런 모습은 어딘가 일정한 틀에 맞춰진 K팝 아이돌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오타쿠들의 전유물로 치부되던 서브컬처 J팝이 서서히 MZ세대의 취향을 파고들어 하나의 컬처로 자리하게 된 데는 이런 차별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핍돼 있던 다양성에 대한 갈증들을 J팝이라는 공간에서 해소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라면 주어진 메인 컬처 안에서 그 갈증을 참고 견뎌야 했다면, 지금처럼 글로벌 환경이 보편화된 시대에는 국경 밖에서 자신에게 맞는 문화를 찾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래서 예전엔 눈치 보며 개인의 서브컬처로 소비하던 J팝이 ‘원더리벳’ 같은 공식 페스티벌을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이들이 유난히 축제에 더 뜨겁게 반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이들은 보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취향을 함께 나눌 동료를 찾는다.
J팝의 국내 열풍에는 넷플릭스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의 역할도 컸다. 넷플릭스를 통해 수많은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이 소개되며 콘텐츠 소비의 저변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J콘텐츠로 바라보는 K콘텐츠의 다양성
올해 상황이 어려운 극장가에서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체인소맨》 같은 재패니메이션이 유독 선전했던 것만 봐도 그 힘을 알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OST로 달아오른 J팝 열풍은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더 많은 J팝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원더리벳 2025’의 대미를 장식한 스파이에어에 운집해 음악에 맞춰 슬로건을 흔들며 떼창을 하는 관객은 그런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서브컬처에서 출발해 다양성의 저변으로 확장된 J콘텐츠에 대한 한국 MZ세대의 열광은 이제 K콘텐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물론 K콘텐츠는 고유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비빔의 미학’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K콘텐츠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여전히 부족한 다양성과 쏠림 현상이다.
과거 매스미디어 시대의 관성이 남아있는 탓이지만, 다양성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이 흐름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업의 방향도 선회를 요구받고 있다. 극장이 1000만 관객을 목표로 작품을 설계하던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K팝 역시 비슷한 아이돌 그룹의 무한 양산으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글로벌 시장뿐 아니라, 점점 취향이 세분화되고 있는 국내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아티스트와 콘텐츠가 다양하게 등장해야 비로소 다양해진 ‘취향의 시대’를 대비할 수 있다. 그저 상업적 기준으로 크고 작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작은 시장일지라도 분명한 취향을 저격한 문화가 당당한 하나의 컬처로 설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은 제2, 제3의 해외 콘텐츠로 향하게 될 것이다. J콘텐츠의 국내 열풍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