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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병X 맞아요”…스캠 사기에 9000만원 날린 스무 살 남천씨 이야기
富 과시하며 ‘코인 투자’ 권유…가짜 거래소 사이트로 유인해 범행

“저보고 그걸 사기당하느냐고, 병X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 병X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분명 누군가 작업당하고 있을 겁니다.”

이제 만 스무 살을 넘긴 남천씨(가명)는 올해 8~10월 로맨스 스캠에 속아 그야말로 피 같은 돈 7000여만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공장에 취업해 선반 가공일을 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다. 남천씨는 “대출 2000만원을 더해 총 9000만원을 사기당했다”며 “처음에는 그토록 애틋하게, 미래를 약속했던 그녀가 나를 속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했던 모든 것들이 설정이고, 그 정도로 디테일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속 메시지는 피해자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로맨스 스캠 사기범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ChatGPT 생성이미지·피해자 제공
사진 속 메시지는 피해자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로맨스 스캠 사기범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ChatGPT 생성이미지·피해자 제공

‘신뢰·애정’ 쌓으려 매일 문자·사진·통화

로맨스 스캠은 이성에게 호감을 산 후 돈을 가로채는 피싱 조직 사기를 일컫는다. 스캠 조직 사기범들은 온라인 소통에 능숙하지만 아직 세상 물정에 밝지 않은 20·30대 젊은 층을 겨냥해 ‘작업’에 나선다. 이들은 일단 타깃이 정해지면 가볍게 접근한 뒤 신뢰와 애정 관계를 형성하고, 이후 투자나 환전을 빙자해 금전을 요구한 뒤 돈을 받으면 그대로 잠적해 버린다.

남천씨도 마찬가지였다. 시작은 지난 8월 한 통의 인스타그램 DM이었다.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10월에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 게시글을 보고 있는데, 당신의 생활을 보고 궁금해서 이렇게 메시지를 보낸다”며 접근했다. 한눈에 봐도 미인인 그녀의 연락에 남천씨도 호기심이 동해 대화에 나섰다. 한국 여행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점점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남천씨도 처음에는 당연히 의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 대화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일하는 가게 사진이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사진, 심지어 요리하는 엄마의 뒷모습 사진까지 보내는 등 마치 홍콩에 있는 연인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처럼 믿게 만들었다. 또 남천씨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전화를 걸기도 하며 남아있는 불신마저 지워버렸다.

그녀는 남천씨와 대화하며 “2017년부터 미국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거나 “삼촌이 금 옵션거래를 한다”는 등 자신이 부자라는 인식도 조금씩 심어갔다. 남천씨에게 “지금은 육체노동으로는 돈을 벌 수 없는 시대”라며 은연중에 무시하는 메시지로 남천씨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투자 권유가 시작됐다. ‘현금 1억원 모으기’가 목표였던 남천씨는 “1000만원 정도 투자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그러자 그녀는 “100만원부터 시작해 이후 수익이 나면 투자해도 늦지 않는다”고 되레 남천씨를 말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본격 범행에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신뢰를 심어주는 이른바 ‘돼지 도살’ 수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그녀가 권한 것은 ‘티어원에프엑스(tier1fx)’라는 암호화폐(코인) 거래소를 통한 투자였다. 각종 코인에 대한 시세 차트와 한국어 지원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사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처음에는 소액을 송금한 뒤 사이트 화면에 수익이 찍히는 것을 보고 안심한 남천씨는 점차 더 큰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출까지 받아 투자를 이어가던 남천씨는 10월초 한 지인이 “사기인 것 같다”고 말하자 오히려 그녀 대신 지인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로맨스 스캠에 당했다는 뼈아픈 현실을 깨달았다.

과거 로맨스 스캠이 어느 정도 신뢰관계를 쌓인 뒤 돈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현재는 남천씨 사례처럼 가짜 코인 거래소나 환전 사이트로 유도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최근에는 자신이 BJ 방송을 하고 있다면서 가짜 플랫폼 접속 후 포인트 결제를 유도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이성이 아닌 동성 간에도 “친구 하자”며 접근한 사례도 다수 있다.

스캠 범행에 사용된 암호화폐 거래소 사이트.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tier1fx 홈페이지 화면 캡처
스캠 범행에 사용된 암호화폐 거래소 사이트.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tier1fx 홈페이지 화면 캡처

사기 이후 “캄보디아 감금됐다”며 또 돈 요구

로맨스 스캠의 조직 규모는 최근 캄보디아 범죄단지 사태 이후 자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남천씨 역시 사기 피해 이후 그녀와 그녀의 조력자에게 캄보디아에 감금돼 있는 것은 아닌지 떠보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은 캄보디아에 감금돼 일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서 “탈출하려면 700만원이 필요하다”며 추가로 돈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로맨스 스캠 사기에 당할 경우 피해금을 되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이스피싱과 달리 긴급 계좌지급정지 신청이 불가능한 데다 코인으로 송금한 경우에는 추적이 더 어렵다. 남천씨는 “사기 피해 이후 법률상담도 받았는데, 변호사가 ‘코인으로 송금해 민사소송은 불가능하고, 형사소송을 해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변호사를 선임하는 대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 변호사를 선임할 돈마저 잃었던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남천씨가 전 재산을 잃은 티어원에프엑스 사이트는 여전히 닫히지 않고 운영되고 있다. 누군가는 또 로맨스 스캠 조직으로부터 ‘돼지 도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여타 피해자들과 달리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로맨스 스캠 피해 사례를 가감없이 공유하고 기사화도 허락한 남천씨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저에게 자신도 같은 피해를 입었다며 DM을 보낸다. 로맨스 스캠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며 “직접 당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남천씨와 같은 피해자들은 로맨스 스캠은 수십 년간 데이터가 쌓이고 수법이 진화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해자들은 현재도 자신이 로맨스 스캠 조직에 포섭됐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들이 수렁에 빠지기 전에 범죄 수법들이 더 많이 알려져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며 “경찰을 비롯해 정부에서도 더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피해 가능성이 높은 연령대와 직업군을 좁혀 사기 피해 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홍보 캠페인을 적극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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