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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한국의 핵잠·우라늄 농축 지지했지만 원전 생태계 살아있어야 실현 가능
정권 바뀌어도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할 수 있게 해야…원자력 진흥법 개정 필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팩트시트(11월14일)는 대한민국 원자력 정책사에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핵추진잠수함과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80년 숙원이었던 한반도 평화와 에너지 안보를 향한 첫 발걸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합의가 시작이자 선언일 뿐, 실질적인 권한 확보는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 기회를 진정한 성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안보와 민생’을 함께 고려하는 균형 잡힌 정책이 필요하다.

한미 정상이 핵추진잠수함 사업에 동의하고 팩트시트로 정리한 것 자체는 명백한 진전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미국은 ‘원자력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이어질 ‘절차’를 지지한다고 명시한 점이다. 이는 향후 진행될 절차에 대한 동의일 뿐이지, 권한의 확정적 부여가 아니다. 결국 실질적 권한 확보를 위해서는 추가 협상과 법적 근거의 정비가 필요하다.

정부는 원자력을 안보 목적과 민생 목적으로 구분하려 한다. 핵추진잠수함이라는 안보 목적으로는 원자력을 이용하면서,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전력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은 외면한다. 정책적 모순이며 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한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술적·산업적 필연성이다. 핵추진잠수함과 우라늄 농축 사업은 단일 기술과 시설 확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인력 양성-연구개발-제조-운영-유지·보수로 연결되는 원자력 생태계가 살아있을 때만 실현된다. 원전산업을 방치하면 핵추진잠수함 사업도 부정적 영향을 피할 수 없다.

2024년 11월18일 미국 해군 로스앤젤레스급 원자력추진잠수함(SSN) 컬럼비아함이 군수품 적재와 승조원 휴식을 위해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4년 11월18일 미국 해군 로스앤젤레스급 원자력추진잠수함(SSN) 컬럼비아함이 군수품 적재와 승조원 휴식을 위해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일 “원자력 목적, 국가안보 기여” 명시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원전이 99.99% 안전하더라도 그 0.01% 때문에 위험성을 강조하는 게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 당시의 ‘해외에는 원전 수출, 국내에는 탈원전’ 같은 엇박자 정책을 보는 것 같다. 핵추진잠수함의 정상적인 건조와 운영은 고도의 원자력 기술과 활발한 원전산업이 전제될 때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 각국은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을 국가 존망의 문제로 본다. 특히 AI와 반도체 중심의 디지털 시대에 진입하면서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에너지 자원의 90% 이상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면서도 위기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반도체 수출로 번 외화의 대부분이 에너지 수입에 사용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국제 정세 악화 시 에너지 자원 수입이 원천 차단될 위험을 고려하면, 우리 같은 자원 불모국이 ‘두뇌 자립형’ 에너지인 원자력을 외면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문제를 이해하려면 일본과의 비교가 필수적이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불평등이 아니라 원자력산업의 발전 가능성과 직결되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은 여전히 제약이 크다. 우라늄 20% 미만 농축 시 미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고, 재처리는 연구개발 목적으로만 허용된다. 반면 일본은 포괄적 사전 동의 개념을 도입해 사전 합의 범위 내에서 개별 승인이 불필요하며, 20% 이상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도 가능하다. 이는 절차적 효율성뿐 아니라 기술적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이 차이는 단순한 협정 조항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 추진의 현실적 가능성과 산업 발전 속도를 근본적으로 좌우한다.

국가 백년대계를 지향해야 할 원자력 정책이 정부 교체 때마다 영향받는 이유 중 하나는 정책을 받쳐줄 법적 기초가 취약하다는 데 있다.

미국은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에서 국방·안보 지원과 함께 국민 복지 향상과 산업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도 2012년 원자력기본법을 개정해 ‘인류 복지와 국민 생활 수준 향상 기여’에 더해 ‘안전 보장 이바지’라는 목적을 추가했다. 안보와 민생이 마치 바퀴의 앞뒤처럼 서로를 받쳐주며 함께 굴러가는 핵심 요소임을 법으로 명확히 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원자력진흥법은 ‘국민 생활 향상과 복지 증진 기여’만 규정할 뿐, 국가안보에 대한 목적 규정이 없다. 핵추진잠수함 가동까지 10년 이상 소요되는데 이 기간에 정부는 두 번 이상 교체될 수 있다. 법적 기초가 없으면 정책의 연속성과 신뢰도를 확보할 수 없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혼선이 계속될 개연성이 크다.

 

‘재처리 권한’ 등을 일본 수준으로 확대해야

현 정부가 핵추진잠수함이라는 상징적 성과를 진정한 국가 이익으로 연결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를 정리해야 한다.

첫째, 원자력 정책 방향을 통일해야 한다. 대통령부터 관계 장관까지 ‘원자력은 안보와 민생을 동시에 지원한다’는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정부와 국민이 하나 된 모습을 보일 때 사업의 추진력과 협상력이 극대화될 수 있다.

둘째, 원자력진흥법을 개정해야 한다. 미국·일본처럼 원자력의 목적에 ‘국가안보에 기여함’을 명시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문구 개정이 아니다.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일관된 원자력 정책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국제 협정을 조기에 정비해야 한다. 2035년 종료 예정인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 조기 착수해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일본 수준으로 확대해야 한다. 핵추진잠수함 연료 공급을 위한 별도의 협정 체결과 비확산 통제 방식 등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안보와 민생은 충돌하지 않는다. 국가안보가 확실할 때 국민의 삶도 안정화되고, 에너지 안보가 확보될 때 경제도 성장한다. 미국과 일본이 원자력법에 이 두 목적을 함께 명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팩트시트는 역사적 선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성과로 연결되려면, 원전산업 활성화와 법적·제도적 정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원자력이 국가안보와 국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토록 여건을 정비함으로써 핵추진잠수함이 가져온 지금의 합의가 단순한 외교 성과를 넘어 국가 이익을 강화하는 토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0년 숙원의 실현은 팩트시트 발표가 아니라, 원전산업의 활기와 에너지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정부의 단호한 결단이 결정한다. 역사는 선언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는 현실로 구현된 결과만을 기억한다. 

이유한 국립창원대학교 대학원장
이유한 국립창원대학교 대학원장

■이유한은 누구

서울대에서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한 뒤 과학기술부, 국무총리실, 국가정보원에서 공직을 수행했고 서울대 객원교수 및 (주)두산에너빌리티 고문을 역임. 2025년 6월부터 국립창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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