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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여객선 신안 앞 해상 좌초에…쓸어 내린 가슴
세월호 참사 멀지 않은 지역…승객들 “공포의 밤”
항해사 ‘휴대폰’ 사용 알려져…“안전불감증” 지적

“아직도 11년 전 세월호 참사 악몽이 생생한데, 수백명이 탑승한 여객선이 깜깜한 밤중에 좌초됐다는 뉴스에 가슴을 졸였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승객 전원이 구조됐다니 다행입니다.”

전남 진도 임회면 진도항(팽목항) 인근에서 펜션과 편의점을 운영하는 박미숙(63)씨는 그날의 악몽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란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눈앞에서 희생자들의 수습 과정을 지켜봤던 박씨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딸이 제주~목포 여객선이 좌초됐다고 고함을 질러 놀라서 깼다”며 “세월호 트라우마 때문에 또 큰일 치르는 것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말했다.

11월 19일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도 남방 족도에 여객선 퀸제누비아2호가 좌초돼 해경이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목포해양경찰서 제공/ 연합뉴스
11월 19일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도 남방 족도에 여객선 퀸제누비아2호가 좌초돼 해경이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목포해양경찰서 제공/ 연합뉴스

267명 전원 무사 구조 소식에 “천만 다행” 

19일 늦은 밤에 전해진 신안 장산도 앞 해상서 수백명을 태운 대형여객선이 좌초됐다는 소식에 세월호 참사 기억이 남아 있는 지역사회는 긴장감에 휩싸인 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번 사고는 ‘진도인근 해상’ ‘여객선 좌초’ ‘급변침’이라는 뉴스 속보 제목만으로도 2014년 4월 16일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했다.

더구나 사고 지점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진도 맹골수도 해역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어서 지역민들은 더욱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고 소식을 접한 지역민들은 “뉴스를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행여나 대형 재난으로 이어지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구조 소식에 촉각을 세웠다”, “인명피해 없이 전원 무사히 구조됐다니 다행이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역민들은 다음날(20일) 아침 항해사가 ‘휴대전화를 보다가 방향을 바꿔야 하는 변침 구간을 놓쳤다’는 황당한 사고 원인 소식에 또 다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모습이 역력했다.   

19일 전남 신안군 장산면 남방 해상에서 총 267명을 태운 대형 여객선이 무인도에 좌초되며 하마터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목포해경에 따르면 이날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면 장산도 인근 해상에서 2만 6546톤급 여객선 ‘퀸제누비아 2호’가 항로 인근 암초로 추정되는 지점에 좌초했다. 

사고 여객선은 이날 오후 4시 40분경 제주항을 밤 9시 30분경 목포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도착 1시간 10여분을 앞두고 항해 도중 ‘펑!’하는 충격음과 함께 멈춰 섰고, 해경에 “돌섬(족도)에 좌초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9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해양경찰서 전용 부두로 여객선 퀸제누비아2호 탑승객들이 구조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동하고 있다. 267명이 탑승한 퀸제누비아2호는 이날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도 남방 족도에 좌초됐다. ⓒ연합뉴스
19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해양경찰서 전용 부두로 여객선 퀸제누비아2호 탑승객들이 구조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동하고 있다. 267명이 탑승한 퀸제누비아2호는 이날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도 남방 족도에 좌초됐다. ⓒ연합뉴스

“쾅! 소리에 배 기울어”…아찔했던 공포의 ‘3시간’

어둠이 짙게 깔린 야간 운항 중 벌어진 이 예기치 못한 사태는 탑승객들에게 현실판 ‘재난 블록버스터’를 방불케 하는 씻을 수 없는 ‘공포의 밤’을 안겨줬다.  

배에 타고 있던 한 승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가 꽝! 소리와 함께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몸이 크게 넘어질 정도로 충격이 컸다”며 “이러다 꼼짝없이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머리가 하얗게 됐다. 급히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 갑판으로 올라갔다”고 아찔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탑승객 이명갑 씨는 “굉음이 나자마자 선체 밖으로 나왔다”며 “무서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승객은 “좌초로 인해 운항이 중단됐고 침수는 발생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안내가 있었다”며 “전원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 등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다”고 전했다. 반면 한 승객은 “배가 암초에 섬에 얹혀있는데, 승객들이 뱃머리에 모여 있는 동안에도 선내 방송은 한참 후에야 나왔다”며 “우왕좌왕하는 상황인데도 ‘모여서 기다리라’는 방송이 전부였다”고 부실한 현장 통제에 불만을 표했다.

사고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 승객들이 올린 현장 사진에는 충격 여파로 여객선 매점 내 판매대가 쓰러져 넘어졌고 진열된 상품도 대부분이 쏟아져 바닥을 뒹군 모습이 담겼다. 선내에 침수가 발생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구조 당시 사진 속에는 승객들 대부분이 침착한 분위기 속에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짐을 챙겨 여객선에서 내려 구조함에 옮겨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

사고 당일 밤 11시께부터 순차적으로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해경의 도움을 받아 목포해경 전용부두에 도착한 탑승객들은 충격을 추스리지 못한 채 “아직도 무섭다”고 몸을 떨었다. 짐꾸러미를 들고 뭍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에야 안심하는 승객도 있었다. 사고 발생 3시간여 만에 해경 함정으로 전원 구조된 승객 중 다수는 여행길의 악몽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일부는 인근 숙박업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구조당국의 사고 대처는 과거 대형 재난사고와 달랐다. 소아 5명과 유아 1명을  포함한 어린이와 임산부, 노약자 순으로 진행된 구조 작업은 오후 11시 27분께 마지막 승객이 해경 구조함정에 탑승하기까지 3시간 10분가량 걸렸다. 좌초 당시 충격으로 통증을 호소한 승객 30여명이 병원으로 분산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큰 부상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구조 작업에는 경비함정 17척과 연안구조정 4척, 항공기 1대, 서해특수구조대 등 가용할 수 있는 해경 자원이 모두 투입됐다. 구조과정에서 위험할 수 있는 사다리 대신 배 후미의 차량 선적용 램프를 경비함정과 연결해 승객들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20일 오전 전남 신안군 장상면 인근 족도(무인도) 해상에서 퀸제누비아2호가 이초돼 있다. 퀸제누비아2호는 전날 족도에 좌초됐다가 신고 접수 6시간 만에 선사의 예인선으로 섬을 벗어났다. 승객 246명·승무원 21명 등 267명 전원 무사 구조됐으나 좌초 충격으로 일부가 경미한 통증을 호소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목포해양경찰서 제공/연합뉴스
20일 오전 전남 신안군 장상면 인근 족도(무인도) 해상에서 퀸제누비아2호가 이초돼 있다. 퀸제누비아2호는 전날 족도에 좌초됐다가 신고 접수 6시간 만에 선사의 예인선으로 섬을 벗어났다. 승객 246명·승무원 21명 등 267명 전원 무사 구조됐으나 좌초 충격으로 일부가 경미한 통증을 호소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목포해양경찰서 제공/연합뉴스

항로 이탈인가 암초 충돌인가…해경, ‘운항 과실’ 무게

사고 여객선이 충돌한 곳은 족도로 불리는 무인도다. 충돌 지점이 일반적인 항로에 있는 섬이 아니거나 야간 운항 중 시야 확보의 어려움으로 암초 성격의 작은 섬과 충돌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고 당시 파고 약 0.5m로 잔잔한 수준이었으며 음주 여부 조사에서도 별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수사 전담반을 구성한 목포해경은 여객선 좌초 원인으로 뒤늦은 변침(방향 전환) 등 선장과 항해사의 운항 과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초기 수사 과정에서 항해 책임자가 휴대전화를 보는 등 집중하지 않다가 항로를 이탈해 사고를 낸 사실이 드러났다. 

해경에 따르면 사고 발생 지점은 연안 여객선의 항로가 겹치는 협수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구간을 통과하는 선박은 자동항법장치에 의존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고 당시 항해 책임자는 휴대전화를 보느라 수동 조작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선박은 변침(방향 전환) 시기를 놓쳤고, 무인도로 돌진해 선체 절반가량이 걸터앉는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채수준 목포해양경찰서장 등은 20일 전남 목포시 목포해경 전용부두에서 언론 브리핑을 열고 “배가 변침을 뒤늦게 해 평소 항로를 벗어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20일 오전 전남 목포시 삼학부두에서 해경과 국과수가 2만6000톤급 여객선 퀸제누비아2호에 대한 감식을 하고 있다. 267명이 탑승한 퀸제누비아2호는 전날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도 남방 족도에 좌초됐다. ⓒ연합뉴스
20일 오전 전남 목포시 삼학부두에서 해경과 국과수가 2만6000톤급 여객선 퀸제누비아2호에 대한 감식을 하고 있다. 267명이 탑승한 퀸제누비아2호는 전날 오후 8시 17분께 전남 신안군 장산도 남방 족도에 좌초됐다. ⓒ연합뉴스

해경은 승객 전원을 목포해경 전용부두로 이송한 뒤 여객선에 남아있던 승무원을 대상으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선박 항적기록(VDR) 등을 분석해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해경은 정확한 사실을 규명한 뒤 관련자들을 형사 처분할 방침이다.

사고 선박인 ‘퀸제누비아 2호’는 2021년 12월에 건조돼 지난해부터 제주~목포 항로에 투입된 비교적 최신형 대형 카페리다. 길이 170미터, 너비 28미터이며 정원은 1010명이다. 차량 118대를 선적할 수 있다. 이번 사고는 최신 선박에도 불구하고 해상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행히 구조당국의 신속하고 안전한 조치와 침수가 발생하지 않아 대형 참사는 피했으나 승무원들의 안전 불감증과 야간 해상사고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경제정의실천현합은 이날(20일) 성명을 내고 “이번 여객선 사고는 다행히 인명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 입법의 주요한 배경 사건 가운데 하나인 세월호 참사의 교훈과 희생자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라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해 무안 제주항공기 참사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공중교통수단이 한순간의 실수나 안전불감증으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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