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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유신 사과하고 김대중이 김종필과 연합한 이유

대통령 지지율이 가파르게 상승하자 보수 강성 지지자들은 ‘중도 확장론’을 내부 총질이라고 깎아내리며 “중도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지지율 정체를 겪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금까지 자신의 주장을 손바닥 뒤집듯 하며 ‘우클릭’을 통한 중도 확장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쪽은 ‘중도 무용론’을, 한쪽은 ‘중도 확장론’을 주창한다. 중도 무용론은 2012년 민주당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 쪽에서도 제기했었다. 근거는 미국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제시한 ‘프레임 이론’이었다. 그는 중도처럼 보이는 유권자들은 진보와 보수 가치관을 둘 다 가지고 있고, 사안에 따라 적용하는 가치를 달리하는 ‘이중개념주의자’일 뿐이라며 “중도는 없다”고 했다.

이중개념주의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상대의 언어를 사용해 좌·우클릭 하면 고정 지지층을 소외시키는 동시에 이들의 진보 혹은 보수적 프레임만 강화시켜 결과적으로 더욱 불리해진다는 게 논지다. 하지만 중도가 없다는 오해는 원문의 ‘middle’, 즉 ‘중간’을 ‘중도’로 번역한 오류로 보인다. 중간에 머물고 있는 이중개념주의자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방법론인데 문해를 잘못한 듯하다. 이념은 지녔지만 자기 이해와 상황에 따라 교차 투표하는 스윙보터가 이중개념주의자이고, 이중개념주의자들이 바로 중도층이다. 최종적으로 누군가를 선택하기에 선택의 중간은 없지만, 선택 과정에서 지지를 미루고 관망하는 중도는 엄연히 존재한다. “중간은 없다”고 해야 논리에 맞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체포영장을 집행한 1월15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체포영장을 집행한 1월15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다자 아닌 양자 구도에선 중도층이 관건

2002년 대선 패배 후 2004년 제1당까지 뺏긴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의 고(故) 박세일 여의도연구소장은 보수 재집권을 위해 우파적 가치에 좌파적 가치를 얹은 ‘공동체적 자유주의’를 내세웠다. 이명박은 집권 중반기 국정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도실용 서민 정책을 표방했다. 경제민주화 공약과 구 민주계 영입을 통한 중도 전략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따뜻한 보수론’을 주장하는 유승민을 내치고 친박 중심으로 당을 재편하다 탄핵당했다. 2000년 이후 보수당은 중도화 전략을 통해 집권했고 다시 강성으로 회귀하며 무너졌다. 보수당의 중도 전략은 IMF 이후 무너진 보수의 정체성과 기우는 운동장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김대중은 앞선 두 번의 대선에서 자신을 옭아맨 ‘용공론’ 방어를 위해 보수 원조 김종필과 연합했다. 노무현 또한 ‘재벌’ 출신 정몽준과 단일화를 했다. 문재인도 비록 낙선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와 손잡았다. 불리한 판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수와 중도를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현재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상징인 기본소득 재검토를 시작으로 반일과 친중 포지션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친일과 친미를 표방하며 중도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다자 대결과 양자 대결은 양상이 다르다. 세세한 각론은 차치하고, 크게 보면 다자 대결은 주로 제3후보가 중도표를 잠식하기 때문에 1위 후보는 거의 자기 지지층에 소구한다. 1987년 13대 대선 4자 대결에서 대구·경북(TK) 지역과 호남 제외 지역 보수층 지지를 받은 노태우가, 정주영이 16.3%를 가져간 14대 대선 3자 대결에선 영남과 보수동맹의 확실한 지지를 얻은 김영삼이 비교적 쉽게 이겼다. 이인제가 19.2%를 잠식한 15대 대선도 DJP연합으로 세를 불리고 수도권을 공략한 김대중이 당선됐다. 각 진영이 세분화됐던 19대 대선도 문재인이 자기 진영으로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반면 양자 대결은 중도 확장 없이 지지층만으로는 힘들다. 16대 대선 노무현은 ‘서민 대 귀족’ 프레임으로 이회창 후보를 소수의 대표로 몰아 중도를 포섭했고 수도 이전 공약으로 중원인 충청을 공략해 이겼다. 18대 대선 박근혜는 김종인을 영입한 뒤 유신에 대한 사과, 경제민주화, 구 민주당계 인사 영입을 통한 중도 확장으로 승리했다. 지난 대선 윤석열 역시 중도를 상징하는 김종인 영입을 필두로 구 민주당계 영입, 안철수와 단일화, 이준석의 세대포위론까지 중도층을 아우르는 ‘반문재인 연합’을 통해 신승했다. 양자 대결에선 공히 중도, 중원을 공략하고 세대 확장을 꾀했다.

이명박이 48.7%를 받은 구도가 달랐던 17대 대선을 제외하고 노태우 36.6%, 김영삼 42%, 김대중 40.3%, 문재인 41.1% 등의 다자 대결에선 늘 40% 정도가 최대치였다. 지역, 세대, 이념, 계층 간 세세한 분석이 필요하고 선거마다 양상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51대 49의 양자 대결에선 10% 이상을 더 확보해야 한다. 세대와 중도 확장 없이 독자적 승리는 어렵다. 집단 극화가 심화되면 중도층이 좀 줄어들긴 하겠지만 스윙보터는 여전히 존재한다. 지금도 윤 대통령의 계엄엔 반대하지만 동시에 이재명 대표에게 거부감을 가진 중도층이 상당히 존재한다. 만약 조기 대선이 열린다면 후보나 상황에 따른 이들의 선택은 미지수다.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1월23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권성동 원내대표 ⓒ시사저널 박은숙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1월23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권성동 원내대표 ⓒ시사저널 박은숙

집단사고 하지 않고 개인 이해·신념에 충실

중도는 단순히 이념적 중간층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도를 정치 무관심층이라고 보는 것도 오해다. 중도는 집단에 쉽게 동화되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후보를 따라 지지 정당을 쉽게 바꾼다. 지역 및 이념 지향적 투표 성향보다는 당시의 정치 상황과 이슈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성을 나타내는 스윙보터들이다. 2017년 19대 대선 뒤 민주연구원의 사후 출구조사에서 문재인에게 투표했다고 응답한 유권자 중 무려 16.6%가 18대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투표한 스윙보터들이었다.

지난 대선 한국갤럽 사후 조사에서 선거 한 달 전 후보 확정 유권자가 66%로 나타났다. 선거 후반 일주일 이내 결정한 유권자는 24%인데 이들을 중도, 스윙보터라 보면 거의 맞다. 중도층은 진영에서 비켜 있기 때문에 집단적 사고를 하기보다 개인의 이해와 신념에 충실하다. 이념과 정당을 넘어 정권 심판, 정책, 후보의 경력과 능력, 도덕성, 덜 나쁜 후보 선택 등 다양한 기준과 이유로 투표한다. 조기 대선을 체제 전쟁이라는 이들도 있지만 과연 중도층도 거기에 동의할까? 지지층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은 기본이지만 중도 확장도 불가피하다.

부패와 거짓말에도 ‘스트롱맨’ 트럼프가 당선된 것을 두고 강하게 어필하면 중도는 따라온다며 중도는 없다고 단언하는데, 그건 트럼프의 ‘먹사니즘’과 미국 우선주의가 중도층에 먹혀든 것이지 중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비전과 신망으로 강하게 어필해야 먹히지, 동의하지 않는 거친 이슈로 목소리만 높이면 오히려 중도는 외면한다. 극단에 서 있으면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링 위에 선 선수는 관중의 함성이 들리지 않고 오직 상대방만 보인다. 들리지 않는다고 관중이 없는 게 아니고, 유튜브나 광장의 목소리가 전부는 아니다.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도 광장에 나가지 않는 중도층은 양쪽을 지켜보고 있다. 51대 49의 싸움에선 1%라도 더 끌어와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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