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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묻혀있었던 ‘폐족(廢族)’이란 오래된 말이 봉인을 풀고 다시 튀어나왔다.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족속’이라는 뜻을 지녔고, 《조선왕조실록》 같은 고문헌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그 단어다. 현대에 들어서는 2007년 17대 대선 패배 직후 안희정 당시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위원장이, 자신이 쓴 글에 다산 정약용의 가족 사례를 거론하며 ‘친노(친노무현)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라고 적어 널리 회자된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 나온 ‘폐족’ 발언의 발원지는 국민의힘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후 이 당소속 한 중진 의원의 입에서 “우리는 폐족이 됐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우니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이번 21대 대선 직후에는 당내 한 의원이 친윤석열(친윤)계 의원들을 향해 “구심점이 사라진 친윤은 폐족처럼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판을 내놓으면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8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당 3·4선 의원들과 간담회를 마친 뒤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8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당 3·4선 의원들과 간담회를 마친 뒤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 패배 이후 “폐족은 물러나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당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 당 안팎에서 잇달아 나오지만 지금 국민의힘은 그저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엇을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은 채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모습이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대선 패배의 원인에 대한 성찰에 골몰하고, 새롭게 태어나 국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각오를 간절하게 드러내도 위기를 벗어날지 말지 알 수 없는 처지인데도 그렇다. 심지어 김문수 후보가 41.15%의 득표율을 올린 점을 들어 일각에서 “그래도 선방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고 하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두고 국민의힘 소장파 모임인 ‘첫목회’에서 “대선 평가를 들어보면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윤석열을 크게 외쳤던 지역도 이번 대선에서 지지율이 많이 빠졌다. 지금 몇 퍼센트로 졌다고 하면 성찰로 나아갈 수 없다”는 쓴소리가 나오는 등 비판은 끝이 없다. 이처럼 쇄신(刷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는데도 쇄신을 뜻하는 ‘쓸고, 털고, 닦아내 새롭게 하는’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국민의힘의 현실이다. 계파에 따라 물과 기름 같은 대립이 길어지면서 ‘심리적 분당상태’라는 진단도 공공연히 나올 정도다. 그에 더해 당 비대위원장이 내놓은 ‘대통령 탄핵 반대 무효화’ 등 5개 개혁안에도 여전히 응답이 없는 데다, 당 정치의 핵심인 원내대표 자리마저 또다시 친윤계로 분류되는 의원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다.

얼마 전에 발표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국민의힘은 21%라는, 비상계엄 이후 최저 수준의 성적표를 받았다. 자기들 표현대로 ‘거대 여당의 공포 독재’에 대한 우려를 아무리 목청껏 외치더라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이가 많아야 하는데 지지율 21%라는 버팀 자리는 너무나 협소하고 연약하기만 하다. 지금 국민의힘은 마치 “불이야”를 소리치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외진 구석에서 초라한 몸집으로 터뜨리는 말들은 멀리 가닿지도 못할뿐더러 안쓰러움만 자아내기 십상이다. 민심의 한 축을 지키고 대변해주어야 할 제1야당이 맥없이 무너지면 우리 민주주의도, 꼭 필요한 견제 기능도, 균형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할 사회통합도 결국 볼품없이 쪼그라들 것이 빤하다. 정치의 두 날개가 온전히 움직여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날아갈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스스로 당당해 흔들리지 않는 야당의 존재가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안에서 강한 조직이 밖에서도 강하게 통할 수 있다.

김재태 편집위원
김재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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