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추석과 같은 명절 연휴의 귀성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큰 돌덩이들이 있다. 겉면마다 판에 박힌 서체로 쓰인 ‘바르게 살자’라는 글씨는 그 크기에서부터 압도하듯 시선을 잡아챈다. 30여 년 전 신군부 정권 이후 대로변이나 마을 어귀에 유행처럼 세워져 구시대의 화석인 양 남겨진 그 돌덩이들은 거기에 쓰인 글귀 그대로 우리들을 과연 바른 삶으로 이끌어주었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무엇이든 한번 만들기가 어렵지, 만들어지고 나면 치우기가 쉽지 않다는 교훈을 다시금 깨우치기도 한다. 이 돌덩이를 어느 길에선가 우연히 마주치면서 문득 이재명 대통령이 얼마 전 자신의 SNS에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손님 맞이 전 국민 대청소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 돌 글씨를 새겨 세운 바르게살기운동 관련 단체에서 자주 벌인 활동 가운데 하나가 대청소 운동이었다는 사실이 겹쳐 생각났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열릴 대규모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 대통령의 고민이 참 깊었던 모양이다. 그 고민이 결국 쓰레기에까지 가 닿았다. 대통령으로서는 참가국 정상을 비롯한 외국 손님들에게 우리 국민들의 저력을 보여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는 선의에서 내놓은 제안이겠지만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공감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 마당을 쓸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부모님이 마당을 쓸라고 말했을 때 들었던 서운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국민 개개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공무원 사회가 대통령의 이 말에 어떤 연쇄반응을 보였을지도 적이 걱정됐다. 결과적으로 SNS에 언급된 대청소 기간인 9월22일부터 10월1일 사이 열흘은 별다른 파장 없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흔들렸던 기억을 많이 가진 우리 국민들로서는 이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대통령의 말이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사례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거슬러오를 필요도 없다, 불과 1년4개월여 전에 당시 대통령이 주무 부처 장관도 ‘패싱’한 채 직접 나서서 급작스럽게 공개한 이른바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여진과 해악은 아직껏 많은 국민을 괴롭히는 ‘윤석열식 일탈 정치’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윤 전 대통령은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최대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개발 추진을 호기롭게 발표했지만, 후과는 참담했다. 올 2월에 이 프로젝트는 최종 실패로 판명 났는데, 이미 시추 비용으로만 1000억원 이상이 바다에 잠긴 뒤였다. 지자체 단위에서 날린 돈, 지역 어민들의 피해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 커진다.
이번 추석 민심 밥상에 오른 화제 중 하나인 ‘방송 속 밥상’ 논란도 대통령의 선택과 관련해 뒷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을 통해 K푸드를 세계에 알릴 기회를 넓혀보려 했다는 의도나, “대통령의 일인다역은 필연적”이란 총리의 말이 이해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국가 전산망 마비사태라는 재난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를 넘겨 출연한다고 해서 그 역할과 의도가 희석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다른 모든 사안을 떠나 국가 최고지도자의 말이나 행동은 왜곡돼 전달되거나 해석될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아끼고 아껴서 나와야 한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을 대통령 스스로 나서서 만들 필요는 더더욱 없다. “시선이 깊은 사람이 말도 깊다” “무겁게 내디딘 걸음이 깊은 발자국을 남긴다”는 경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말이다.